[최기복의 孝칼럼] 인성(人性)교육의 허(虛)와 실(實)
[최기복의 孝칼럼] 인성(人性)교육의 허(虛)와 실(實)
  • 최기복 대전하나평생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5.03.2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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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孟子(맹자)도 악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旬子(순자)도 둘다 정답이요 오답이다.
사람 또한 동물의 부류다. 원시적인 조상을 유인원이거나 원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직립해서 생활하는 동물이요 본능과 이성을 함께 갖춘 동물이다.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들과 인지능력, 지각능력, 감성, 지능, 지혜를 갖춘 이성적인 동물과는 차이를 둘 수밖에 없기에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필요한 물건을 만들 수 있고 끝없는 이상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 등이 짐승이라고 불리우는 여타의 동물들과 구별되어야 하는 요소인 것이다.
배가 부르면 소화가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뱀. 사냥감을 보고도 사냥을 포기하는 사자 등은 짐승이다.
99섬 가진 부자가 한 섬 가진 가난뱅이의 한 섬을 빼앗는 인간의 욕심을 우리는 긍정적으로 보아 넘겨야 할까? 아니면 짐승만도 못한 행위라고 치부해야 할까?
인성교육을 한답시고 남을 위해 혹은 부모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강요하는 교육은 이 시대 바람직한 교육일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는 일은 무조건 경쟁자를 밟고 앞서 가는 것을 강요해야 할까?
필자가 오랜 동안 효교육을 하면서 효란 공유의 행복이라고 기독교인들의 주기도문처럼 입에 달고 산다. 지금도 그렇다.
인성교육의 시작과 끝은 효라고 강변한다.
거의 대부분 공감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인지 어떤 행위가 효행인지 모호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답은 홍익인간이다.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수 있는 행동인가 해롭게 하는 행동일까를 두고 선과 악의 모호한 기준에 선을 그어야 한다.
악행을 보면 방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징벌해야 하고 선행은 조건 없이 장려해야 한다. 작금의 현실은 선행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에 그냥 방관하는 경향이다.
악행은 처벌 대상이지만 인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해야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법적 제재를 안하거나 게을리 하고 지나치게 관대함으로서 타성에 절은 사람들은 비인성적 처신이 문화로 고착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절대적인 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학자도 있다.
절대적인 선은 홍익인간이고 교육의 목적을 홍익인간으로 한다면 사는 이유를 홍익인간으로 한다면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를 생각 해 본다.
함께 공유해야 할 상대가 없다면 사는 이유가 없을 것이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나와 대등한 삶의 됨됨이.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하는 상대방 입장에서의 자신을 바라보기 등이 인성교육의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선의의 경쟁을 통하여 서로 발전하고 상대의 존재가 나의 거울이 되고 사람들과 어울려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문명의 이기를 나누며 사는 일. 그리고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다 해도 과정과 절차가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
남아도는 힘을 어려운 이웃에게 쏟아 부어 넣어 주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인성교육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사람다운 일을 하루에 단 한 번이라도 행하고 있는가?
입으로만 되뇌이는 인성교육. 아이한테 푸른 신호에 길을 건너라고 해놓고 아이의 손을 이끌고 붉은 신호에 길을 건너는 어머니. 그 짓은 이기주의도 아니다. 실용주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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