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大孝로 가는 길
[최기복의 孝칼럼] 大孝로 가는 길
  • 최기복 대전하나평생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5.05.0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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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가라사대 네가 네 입으로 효를 효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효가 아니다.
효심이란 효행을 꿈꾸는 자들의 마음 속에 담겨진 의무감 같은 것이다.
효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효행은 눈에 보이는 가장 아름다운 시. 즉, 행동하는 시(詩) 같은 것이다.
부모의 은혜를 가슴에 담고 살면서 그 은혜를 단 한 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갚는 행위가 효행이다.
그리고 그 관계를 우리는 천륜이라고 부른다. 천륜이 무너지는 마당에 인륜이 무너지는 것은 무슨 상관이랴.
천륜이 무너지는 이유는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가족제도의 붕괴와 숭물(崇物)사상의 팽배다. 대가족 제도는 가장의 가부장적 권위 아래 서열이 엄존했고 의식주를 함께 하는 생활 공동체적 틀이 잡혀져 있었다.
좋은 것, 맛있는 음식 등은 제사라는 이름으로 위패 혹은 신주 앞의 단위에 선을 보이고 음복이라는 이름으로 윗어른이 맛을 보곤 했다.
이를 보고 자란 아랫 사람은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사상적 정체성과 반복되는 행위 지침으로 몸에 배이게 된 것인즉 별도의 효 교육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효를 학문적으로 분류하면서 이를 소효라고 칭한다. 효를 가르칠 필요가 없을 때 몸으로 보이고 익힐 때의 효다.
지금은 대효의 시대다. 소효가 부모와 자식 간 수직적 종속적인 관계로 주고 받는 관계라면 대효(大孝)란 내가 존재하는 이웃과 사회와 국가로 확대해 수평적 확대를 통하여 주고 받아야 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소효를 통해서 대효를 시행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소효가 붕괴돼 사회전체가 도덕적 불감증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대효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지 모른다.
그러나 당면 과제 중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덕목이다. 과거 칠거지악에 해당되는 아내의 부덕(不德) 중 큰 것이 자식을 못 낳아 대를 끊는 것이었다. 짐승은 대를 잇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사람은 성을 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대중매체는 자식이 부모를 공개석상에서 부끄러운 일면을 들어내게 해 웃음을 선사하는 상술만으로 포장돼 있다.
부모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효는 실종된 폐기물이다. 부모의 권위와 스승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일이 소효를 살리는 길이요 소효가 살아야 대효로 가는 길이 보인다.
대효로 가는 길은 요원하다. 효심이 빛을 발해 효행이 멈추지 않는 감동의 파도가 돼 일렁일 때 대효는 불사조처럼 우리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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