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으로 본 세상] 양정(養正)의 원리와 ‘이괘’
[주역(周易)으로 본 세상] 양정(養正)의 원리와 ‘이괘’
  • 김재홍 충남대학교 교수
  • 승인 2016.10.1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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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養正)이란 기를 ‘양’과 바를 ‘정’으로 바르게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게 기른다는 것은 사람을 기르는 대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정’에는 스스로 자신을 기르는 자양과 다른 사람들을 기르는 양인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의미를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도 볼 수 있다. 수기(修己)란 스스로를 기르는 자양이며 치인(治人)은 다른 사람을 기르는 양인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제일주의 가치관에 입각한 효율성을 중시하고 있다. 기업들은 ‘국내 1위’, ‘세계 일류’를 최고의 가치로 삼고 있다. 심지어 중 고교에서는 ‘특수고 00명 합격, 일류대 00합격’이란 입시결과를 학교 교육의 최고 지상과제로 간주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일류만을 위한 문화를 맹신하고 있어 그 허와 실을 성찰해야할 시점에 놓여있다.
최고의 속도로 달리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그것을 긍지와 자부심으로 삼는다면 고속 질주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문제점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최고와 일류의 뒤안길에서는 인간의 성실과 가치가 멍들어 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을 기르고 사람들을 바르게 기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양정’의 원리에 대하여 주역 ‘산뢰이괘’는 군자의 인격적 영양소인 음식(성인지도=진리)을 먹고 스스로를 기르라고 말한다.
즉 진리를 자각하여 자신을 먼저 바르게 한 연후에 사람들을 기른다는 만물의 양육을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어둔 사람이 길(吉)하려면 밝고 어진 사람을 찾아 스스로를 개발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주역에서 가장 길한 것은 동몽(童蒙)의 상이다. 동몽(童蒙)이란 몽매하지만 어린이처럼 진실 되고 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어린아이는 대개 어른이 옳은 말을 하면 의심하지 않고 따른다. 바로 이점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고 길하다는 것이다.
길에 어둡다면 길 밝은이를 찾아 길을 물어보고 가야 낭패를 당하지 않는다. 이 상식을 잊지 않고 밝은이를 찾아 믿고 따른다면 세상은 밝아질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역은 성인의 말씀으로 바르게 기르고, 스스로 구하라고 한다. 첫째 “천지가 만물을 기르고, 성인이 어진 이를 기르고 이로써 그 덕이 백성에게 미치게 하나니”라고 했다. 자신이 먹을 음식물인 성인지도를 스스로 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도덕과 재능을 기르기 위해 스스로 수양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그 덕을 쌓아서 백성들을 바르게 기르라고 말한다.
둘째 주역에서는 자기 분수를 지키며,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사람을 기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이나 남을 기를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노력은 하지 않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즉 정작 자신은 귀중한 도덕과 재능을 가지고 자신과 남을 기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귀중한 것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높은 자리와 세도를 부러워하여 턱을 늘어뜨리고 침을 흘린다면 흉하며 화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여건에서 도덕과 재능을 가지고 자신과 주변 사람을 기르라는 것이다.
올바른 기름(養)을 외면하고 가볍게 움직여 부하고 귀한 사람에게 아첨하여 나아가는 것은 양도(養道)에 어긋나는 것이다. 비록 그 길이 서로 응(應)하는 곳으로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흉하며 화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이 같은 행위는 진리와 성인지도를 크게 훼손하는 소인이기 때문이다. 
셋째 주역에서는 만물의 올바른 기름(養)을 위해 필요하다면 아랫사람에게도 지도를 받으라고 말한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기를 수도 있다. 대체로 윗자리에 있는 자가 아래 자리에 있는 자를 기르는 것이 상도(常道)인데 거꾸로 양육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쁜 일은 아니므로 길흉은 없다고 말한다. 아랫사람이지만 올바른 양육의 자질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모양과 세력이 좋은 위쪽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흉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기와 아무런 연고도 없고 동류도 아닌데 부귀만을 보고 나아가는 것은 양육의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재능이 부족하여 스스로의 힘으로는 천하 만민을 기를 수 없을 때는 비록 아래 사람일지라도 지도를 받는 것이 덕을 천하에 널리 베풀 수 있어 길하게 되기 때문이다.
넷째 주역에서는 성인지도로 ‘양정’하면 천하에 경사가 있다고 말한다. 
자신과 사람을 기름에 있어서 외면적인 성과와 실적에 가치를 둔다면 세상은 황폐화 될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타고난 소질이 있다. 그 소질을 개발하고 동기를 부여한다면 전문화 분업화된 현대사회의 유기적 사회구조 속에서 한 분야를 담당할 수 있다. 자신과 사회를 위해 유익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적제일주의 가치관에 입각한 잣대로 세상을 재단한다면 우리는 모두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주역에서는 ‘성인지도’를 스승으로 자신과 사람들을 양육하고 그 덕이 천하에 미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성인의 은택이 천하에 퍼져 있음으로 복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모름지기 성인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천하 만민이 그의 은택을 자각하는 그런 시기를 맞고 있다. 또 최고와 일류를 지향하는 경쟁사회 속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가치와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최고의 성과와 치열한 경쟁에서 허덕이면서 진정한 인간적인 가치를 외면당했던 생지옥 속에서 벗어 날 수 있다. 더불어 성실한 인간적인 가치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고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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