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周易)으로 본 세상] 세상살이가 곤(困)한 이유와 곤괘(困卦)
[주역(周易)으로 본 세상] 세상살이가 곤(困)한 이유와 곤괘(困卦)
  • 김재홍 충남대학교 교수
  • 승인 2016.11.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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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위기에 처하면 짧은 생각으로 그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한다. 간단한 방법을 찾아서 술수를 부려 해결하려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나머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공자는 주역 ‘계사하편’에서 “역(易)에서 이르기를, 돌에 걸려서 곤(因)하여 가시덤불(소인지도)에 의지하고 있음이라, 집에서도 군자를 만나지 못하니 흉하다”고 했다. 공자께서 이르기를 “‘곤’할 바가 아닌데 ‘곤’하니 이름이 반드시 욕될 것이요, 의지할 곳이 아닌데 의지하고 있으니 몸이 위태로울 것이다. 욕되고 또 위태로워 죽을 시기가 장차 이르니 군자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현 시국에 비추어 볼 때 진퇴양난을 당해 ‘곤’함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의 아집과 독선으로 '곤'한 지경에 이르고 그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의지할 바가 아닌 소인지도에 의지함으로 반드시 그 몸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미 욕되고, 위태로워 죽을 때가 장차 이르게 되어 군자지도를 보지 못하는 건 독선과 아집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성인지도(聖人之道)를 불신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은 결과로 피곤함을 초래한 것이다.
주역의 택수곤괘(澤水困卦)에서는 고난에 처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곤괘(困卦)의 ‘곤’은 곤할 곤(困)자로 고난을 의미한다. ‘곤괘’의 괘상(卦象)을 보면 위에는 연못이 있고, 연못 아래에 물이 있다. 이것은 연못에 물이 없으니 바닥이 갈라지는 고난과 곤경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고난을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제는 올바름이다.
‘곤괘’에서는 이런 고난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곤’은 형통하고 바르니, 대인(大人)이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으니, (실천은 없고) 말만 있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말은 ‘곤’함에 처했을 때 천도(天道)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바르게 노력하면 형통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곤’함을 면키 어려우니 대인과 군자처럼 ‘성인지도’를 믿고 따라야 길하고 허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노자는 선비의 등급을 상·중·하로 나누었다. 하등(下等)의 선비는 하늘의 소리에 화를 내고, 중등(中等)의 선비는 의심을 잘 한다. 상등(上等)의 선비는 곧바로 실천한다고 한다.
또 곤괘에서는 “‘곤’은 군자지도가 소인지도에 가려짐이니, 외부로는 험하나 내부로는 기쁨이 있다. ‘곤’하지만 그 형통하는 바를 잃지 아니하니, 오직 군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성인의 말씀이 있는데도 불신으로 그 뜻을 깨닫지 못해서 곤궁해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곤함은 못에 물이 없어서 ‘곤’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다하여 천명에 순응해야한다고 한다. 즉 천명에 순종하고 목숨을 다해 하늘의 뜻을 따름으로써 뜻을 이룬다는 것이다.
둘째,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않을 자리에 않으라.
곤괘에서는 “궁둥이가 나무 그루터기에 걸려 괴로움을 당한다. 깊은 골자기로 들어가 삼년이라도 (사람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 의미는 나무 그루터기에 않자 ‘곤’하여 편치 못함을 말한다. 즉 앉을 자리가 아닌데 앉아있는 것이다. 깊고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 여러 해를 지나도 광명을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깊은 골짜기에 들어갔다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 앞서서 ‘곤’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즉 진퇴양난의 곤경이나 지극히 곤궁한 상태에 빠진다는 것이다. 결국은 인간의 욕구와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져 밝게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군자지도에 의지하고, 소인지도에 의지하지 마라
‘곤괘’에서는 “돌에 ‘곤’하여 가시덤불에 걸려있음이라 그 집에 들어가도 그 아내(군지지도)를 보지 못하니, 흉하다”고 했다. 이것은 대표적인 소인의 곤궁함을 말한다. 지금은 반석과 같은 돌에 ‘곤’하고, 가시덤불에 걸려있는 곤란한 상황이다. 즉 진퇴가 곤란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삼가하고 근신해야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성인지도'가 아닌 독선과 아집으로 나아가면 돌 뿌리에 부딪치게 된다. 결국 가시덤불인 ‘소인지도’에 안주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성인지도’를 믿지 않아서 정도(군자지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리의 자각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니, 성급함을 버리고 성인의 말씀을 믿고 어려움을 견디어 내면 기쁨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정성어린 마음이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그 결과로 복도 받는 것이다.
넷째,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후회하고 노력하면 벗어날 수 있다.
‘곤괘’에서 “칡넝쿨과 위태함에 곤함이니, 말하기를 ‘움직이면 후회함이 있다’고 하여 뉘우침이 있으면 나아가서 길하리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칡넝쿨에 묶여서 위태롭고 피곤한 상황이지만 후회함이 있으면 벗어날 수 있어 길함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올라가서 나무를 뒤덮어 결국 나무가 죽게 되는 상황을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군자지도를 행하면 길하다는 것이다.
군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에 대한 시험이요, 과정이라고 여기고 반성과 노력을 하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인들은 곤경에 처했을 때 스스로 포기하거나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것이 곤경에 처한 군자와 소인의 차이라고 한다.
작금의 혼란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 소리가 공허하게 들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 하늘과 세상의 소리에 반성하고 겸손해야 한다. 스스로 편안해 질 수 있는 근본적인 방법의 무엇인가를 모색하고 성인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견디고 감당할 수 있다. 이럴 때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김재홍 충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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