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조커를 대하는 공리주의적 해법
[김창현 칼럼] 조커를 대하는 공리주의적 해법
  •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승인 2017.09.11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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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사항: 이 칼럼은 2008년에 개봉한 ‘다크나이트’ 내용의 일부를 담고 있습니다.
“극한의 고통은 너를 ‘이상하게’ 만든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2008)는 사실 전설적인 작품으로 간주된다.
고담시를 공포에 떨게 만들고, 무려 배트맨이 짝사랑하는 여자를 고층건물에서 내던져버린 극한의 캐릭터, 조커.
이 영화를 전설로 만든 것은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 중에서 극중 최고의 캐릭터, 조커 역할을 맡았던 히스레져가 이 영화를 끝으로 안타깝게 사고사로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히스레저의 갑작스런 죽음은 이 영화를 전설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크나이트’가 아이들이나 보는 배트맨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크나이트’에서 화려한 액션씬은 극중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영화를 떠받치는 힘은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구조이다. 배트맨은 고담시의 안전과 자유를 지킨다는 ‘선한 목적’을 위해 봉사한다. 최첨단 장비와 무기들은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조커는 이 ‘선한 목적’ 비웃는다. 배트맨이 자기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매일 사람을 하나씩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조커 앞에서 배트맨의 ‘선한 의지’는 결과적으로 죄 없는 사람이 죽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다크나이트’에서 나오는 갈등상황은 같은 해에 나온 책인 마이클 센델 하버드 교수가 집필한 ‘정의란 무엇인가’(원제목: Justice)에도 등장한다.
뚱뚱한 남자를 밀어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전차를 멈추고, 그래서 5명의 죄 없는 인부를 살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당신이 일의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뚱뚱한 사람을 밀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뚱뚱한 한 사람의 희생으로 5명의 죄 없는 인부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죽일 동기로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벤담이나 밀과 같은 공리주의적 윤리관과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관의 괴리를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배트맨은 종잡을 수 없는 조커라는 악당을 통해 자신의 행동의 결과가 결과적으로 고담시민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관이 말하는 보편적 준칙은 조커와 같은 악당의 출현으로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된다. 선한 의지와 동기만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악당으로부터 고담시민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철학이 어렵다고 말하겠지만, 현실은 철학보다 더 어렵다. 얼마 전까지 한반도는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 살갗에 체감될 정도로 전운이 감돌았다. 분석가들은 “전쟁 일어날 확률은 적다”는 분석을 연이어 내놓기도 했다. 혹자는 주식시장의 평온함을 보면서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점치기도 한다.
그러나 조커보다 훨씬 힘이 센 국가원수가 평양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모든 종류의 확신은 위험하다. 조커는 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정은보다는 훨씬 안전한 존재였던 것 같다.

마이클 센델 교수는 뚱뚱한 사람을 죽이고 5명을 살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답변을 하지는 않았다. 현실에서는 안개 속처럼 불확실한 정보들 사이에서 윤리적 선택을 찾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쟁은 분명 그 정반대편으로 우리를 데리고 갈 것이 분명하다.
이번 사드 배치가 전쟁방지를 위한 포석이라는 점이 명확하다면, 진보진영도 민주성과 절차성을 고집하며 반대할지 한 번 재고해볼 일이다. 우리에게는 윤리적 동기를 가지고 행동할 사람보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이라는 ‘결과’를 중요시할 사람이 더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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