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길냥이의 겨울
[김창현 칼럼] 길냥이의 겨울
  •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승인 2017.10.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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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1. 유튜브에 ‘빗질 처음 당해보는 길냥이’라는 동영상이 있다. 동영상이 시작하면 자전거를 타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곧이어 길고양이(이하 ‘길냥이’)가 따라오는 장면이 이어진다. 자전거 바퀴 앞에서 길냥이는 나를 밟고 가라는 듯 배를 내밀고 누워버린다. 고양이에 매료된 우리의 주인공은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고, 고양이용 빗으로 길냥이의 털을 조심스럽게 빗어준다.
별 내용 없어 보이는 이 동영상의 조회수는 120만을 넘었다. 네티즌들은 “길냥이를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주인공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영상”이라고 극찬을 하고 있다.

장면 2. 반려견에게 물려 50대 여성이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반려견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특히 사고를 일으킨 프렌치불독은 목줄도 채우지 않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공분을 사고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개물림 사고건수는 2016년 1000건이 넘게 발생했으며, 올 8월까지만 접수된 건이 1000건이 넘는다. 올해를 넘기면 피해자는 2000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많은 사람들이 반려동물의 사고에 대한 책임은 보호자에게 있다며 사고시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한다. 반면, 사고를 일으키지 않은 견주들은 내심 “우리 개는 안전한데, 사회가 너무 각박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장면 3. 호모사피엔스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처음으로 도달한 것은 약 5만 년 전쯤이라고 추정된다. 대형동물종이 유라시아 바다를 건너 새로운 대륙에 상륙한 것은 지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동물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사냥능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아직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자이언트 캥거루, 주머니 나무늘보, 디프로토돈 등 지금은 볼 수 없는 수많은 대형동물이 살고 있었는데, 인간의 등장과 함께 멸종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대형동물의 무참한 멸종의 범인으로 기후변화가 아닌, 호모사피엔스를 지목하고 있다. 대형동물 멸종의 범인은 다름 아닌 우리의 조상들일 가능성이 크다.

겨울이 다가온다. 인간을 포함한 대형동물들은 5만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이래로 무려 5만 번의 겨울을 났다. 그 결과 인류의 종족수는 70억에 육박할 정도로 지구를 점령하다시피 했으며, 5만년 전 존재했던 대형 동물들의 거의 대부분 멸종되었거나 동물도감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을 멸종시킨 것은 추위를 동반한 매서운 겨울이 아니라 생태계의 최종소비자인 인간의 생존과 번식이었다. 운 좋게, 인간의 친구가 되어 도시에서 살아남은 개와 고양이 같은 종도 존재한다. 고로,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은 생태계 전체로 봤을 때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속담이다.
도시의 겨울은 길냥이들에게는 가혹하다. 요즘 도시에는 쥐도 별로 없다. 고로 요즘 고양이들은 사냥도 하지 않는다는 핀잔은 고양이에게는 가혹한 주장이다. 곳간이 있어야 쥐가 있고, 쥐가 있어야 고양이가 사냥을 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길냥이들은 비닐봉지에 들어있는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면서 연명했다. 그나마 플라스틱 용기가 보급된 이후로 길냥이들은 음식물쓰레기를 접하기도 쉽지 않다. 물론 고양이의 생존에 필수적인 깨끗한 물을 얻기도 힘들다. 고양이의 개체 수가 늘어난다는 이유로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이른바 캣맘, 캣대디에 대한 사회적 시선도 곱지 않다.
지혜가 필요하다. 한 편에서 대형견을 비롯하여 반려동물로 인한 인간의 피해가 없도록 법적 요건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마지막 남은 도시의 포유류들과 우리가 어떻게 평화적으로 공존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고양이 개체수의 증가를 막기 위해서 TNR(중성화 후 방류) 정책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고양이들은 음식물쓰레기를 뒤지다가 고통스럽게 죽지 않도록 자발적 고양이 급식 조직에 대해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둘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도시의 길냥이들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그들의 존재는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삶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길냥이들과 인간의 어색한 동거는 ‘공존이 가능한 종족’으로서 인간의 자격을 검증할 수 있는 마지막 리트머스 용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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