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나 떨고 있니?”
[김창현 칼럼] “나 떨고 있니?”
  •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승인 2018.01.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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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첫 일출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동해를 찾는다. 동해에서 새해 첫 해돋이를 보면서 새로운 마음을 다지기 위해서일 것이다. 해돋이를 보기 좋은 장소로는 포항의 호미곶, 울산 간절곶, 강원도 동해, 속초, 제주도 등 여러 곳이 있지만, 그 중에 '정동진'을 빼놓을 수 없다. 지형학적으로 정동진은 한국의 해안단구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곳이다. 단구(段丘)란 계단형 지형을 말하는 것으로 신생대 3기에 있었던 융기, 즉 들어올림 작용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정동진 역에 가면 하루 종일 어떤 음악이 나오는데, 현 시점에서 20대는 이 음악을 모를 수도 있다. 무려 23년 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음악이다. 30대 후반 이후 세대에게 정동진은 해안단구보다는 드라마 “모래시계”의 고현정 소나무로 더 유명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정동진 고현정 소나무를 안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동진 역은 세계에서도 드물게 바닷가에 붙어있는 기차역으로, 90년대 초반 정동진 역은 광공업의 쇠퇴로 인해 위기에 몰려 있었다. “모래시계”의 후광으로 정동진 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굳이 소개를 하자면, 드라마 모래시계는 1995년에 50%대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이른바 '귀가시계'라고 불렀던 24부작 드라마이다. 주인공은 박태수(최민수 역), 강우석(박상원 역), 윤혜린(고현정 역) 등이 맡았으며, 지금은 톱스타라고 할 수 있는 이정재가 고현정의 보디가드로 출연했다.

“모래시계”에서 정의를 위하여 자신의 친구이자, 정치깡패인 태수에게 사형을 구형한 원칙주의 검사, 강우석의 실제 모델은 현 야당의 대표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로 알려져 있다. 극중에서 강우석은 군생활 중에 5.18 진압군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진압군으로 참여한 죄책감과 트라우마 때문에 사법고시를 한동안 포기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태수는 후배의 광주 집에 놀러 갔다가 얼떨결에 5.18을 경험한다. 5.18에서 시민군 출신 태수는 살아서 돌아가 정치깡패가 되고, 진압군 출신의 대학생은 사법고시를 합격하여 검사가 된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 같은 설정은 실제 모델인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는 무관하다. 모래시계 작가 송지나는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홍준표는 당시 만났던 여러 검사 중 하나일 뿐”이라면서 “지금은 당시와 너무나 달라져서 ‘모래시계’를 계속 이용하는 것은 작가로서 불쾌하다”고 밝힌 바 있다.

‘모래시계’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태수이다.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태수는 육군사관학교를 진학하려 했지만, 연좌제로 인해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혜린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한 태수는 폭력조직의 리더로 성장한다. 그 배후에 ‘정경유착’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법정에 선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태수라 하더라도 사형집행 앞에서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사형 앞에서 태수는 검사인 우석을 불러 "나 떨고 있니?"라고 묻는다. 이 장면은 아마 '모래시계'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 화룡점정이라고 할만 하다.

어쩌면 태수는 억울할 수 있다. 그는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빨치산이라는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서 탈락하면서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혜린이를 사랑했지만, 그 여성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야만 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옳지 않았고, 옳지 않은 방법의 끝에는 결국 "나 떨고 있니?"라면서 모양 빠지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명해진 대사를 읊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다스의 소유주는 “나 떨고 있니?”라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오늘도 ‘모래시계’의 소위 ‘고현정’ 소나무는 묵묵하게 정동진 한 편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태수의 유골은 태수의 아버지의 유골이 뿌려졌던 지리산 자락에 다시 한 번 뿌려진다. 어쩌면, 죄를 지은 사람은 떨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모래시계’가 주는 사필귀정의 교훈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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