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시론] 기호식품 최고는 ‘커피 사랑’
[충남시론] 기호식품 최고는 ‘커피 사랑’
  • 임명섭 주필
  • 승인 2018.03.21 1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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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섭 주필] 오랜만에 필자는 서울로 동창 친구를 찾아 나섰다. 점심을 먹은 친구들은 가까운 커피 전문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행은 커피가 든 컵을 탁자 위에 놓았다.
그 중 한 친구가 어깨에 메었던 배낭을 풀고 미리 준비해 온 과자를 꺼냈다. 친구가 나눠준 과자와 함께 커피를 먹는 맛은 색달랐다. 커피를 마시는 분위디도 달랐다. 흔히 젊은이만 즐겨 먹는 이같은 방법이 어른들에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커피를 먹었겠지만 나이 든 어른들에게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세련되어 보였다.
그냥 무의미하게 마셨던 커피를 친구가 가지고 다녔던 과자로 인해 새로운 커피맛을 알게 돼 ‘커피사랑’을 함께하기로 마음 먹었다.

흔히 잠을 쫓거나 식후 입 안을 개운하게 하려고 마시는 것과는 다르게 요즘 커피전문점 커피는 양도 많다. 또 거리에 너서면 커피 전문점도 한  집 건너 있을 정도로 늘어났다.
커피는 체리처럼 생긴 작은 과일 커피나무에서 수확이 된다. 커피 열매는 과육이 얇고 속의 씨 비율은 높다.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는 과육은 버리고 속 씨를 재료로 쓴다.

자연 그대로 먹지 않고 과육을 제거한 후 속의 씨를 잘 말리면 ‘생두’가 되고 훌륭한 솜씨로 잘 볶은 것이 ‘원두’다. 그렇게 만들어진 원두를 적당히 분쇄해 추출하면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로 탄생된다.

커피는 9세기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밤 기도 시간에 졸음을 쫓기 위한 약으로 커피 열매를 씹어 먹었다.
커피가 잠 쫓는 귀한 약이 되자 이슬람권에서는 씨앗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래서 유럽으로 커피를 수출할 때는 발아하지 못하도록 씨앗을 끓이거나 볶아서 반출 했다.

그런 것이 오히려 커피를 맛있게 만드는 가공법으로 발달된 계기가 됐다. 이후 커피는 15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플에 소개됐고, 그곳에서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생겼다.
그 무렵 커피의 수입을 독점한 것은 베네치아 유대인들이다. 당시는 유대인만 유일하게 이슬람 사회와 기독교 사회를 왕래하며 무역할 수 있었다. 그 때 천주교 사제들은 커피가 악마의 음료라며 교황에게 음용 금지를 탄원했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커피를 맛본 교황은 그 맛에 반해 오히려 커피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단숨에 유럽을 정복했다.
커피 수요가 급증하자 예멘의 유대의 상인들은 커피 독점을 완벽하게 관리하는 차원에서 수출용 커피는 아라비아 반도 남단 ‘모카’ 항구에서만 수출토록 제한했다.

유대인들은 커피 반출을 엄격히 통제했고 심지어 에티오피아 커피까지 모카로 가져와 수출했다. 모카에서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300년간이나 커피 무역을 독점했다.
커피가 모카 항구만을 통해 수출되면서 유럽 사람들은 자연스레 커피를 모카라 불렀다.

또 유대인들은 인도에 스파이를 보내 커피 원두와 묘목을 밀반출해 네덜란드 식물원에서 몰래 커피 묘목을 재배하기에 성공 했다.
유대인들은 커피 재배와 커피 교역을 주도하면서 중남미로 전파되었고 이제는 전 세계로 번져 기호식품 1등품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군을 통해 인스턴트 커피가 일반인들에게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관심이 높아졌고 커피 시장의 경쟁도 치열해 지고 있다. 커피는 이제 단순한 음료를 넘어 생활 문화로 자리잡았다. 

커피는 우리에게 맛과 향뿐만 아니라 그 뛰어난 향미만큼 풍성한 이야기를 피워내는 묘한 마력을 지녔다.그래서 커피를 신이 빚어낸 음료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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