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기 신화와 미술의 오디세이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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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는 막달라 마리아(1)
  • 서규석 박사
  • 승인 2007.03.15 1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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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와 더불어 예술적 표현소재로 등장하는 여인으로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남성에 종속적인 형태로, 성적 은유나 참회의 대상으로서 종종 묘사되어 왔는데 막달라 마리아도 그 가운데 한 여인이다. 팝 가수 헬렌 레디가 부른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의 주제도 막달라 마리아였다.
성서에는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 27-28)”라고 하였다.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 같은 언급은 남녀가 동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곧이어 이어진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한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니”라는 데에 이르러 여자는 남자의 모사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주위에는 생동감 넘치고 사려 깊은 여인들이 많이 등장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여도 노예의 구분도 없는 하나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부활한 지 1세기도 채 안되어 교회가 남성적인 시각으로 변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교단이 남성위주로 가부장제화 되어간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신의 남성적 이미지에 초점을 두고 교부(敎父)들이 남성의 눈을 통해 여성을 묘사한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구약성격을 보면 대략 137명의 여성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성적인 은유나 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거부, 폭력성에 대한 언급이 많고 소수의 여성을 제외한 대부분이 우상숭배자, 유혹하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여자는 어느 남자든 남편으로 삼지만 남자에겐 더 좋은 여자가 있고 덜 좋은 여자가 있다는 유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좋은 아내를 만나는 것은 행복을 얻는 것이다(잠언18: 22),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리라(잠언 25:24) 는 표현 등으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을 지적하는 것이 많다.
사실 예수의 생애를 보면 여성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한 여인의 품에서 탄생하였고, 여자의 추종을 허락하였으며(누가 8:2-3), 교회의 첫 번째 여자들도 예수를 따라 함께 수행하던 추종자들이었다.(누가 8:1-3)
골고다의 십자가 곁과 무덤까지 따라간 것도 막달라 마리아였고(요한 19:25, 마태 27:55, 마가 15: 40-41), 부활한 예수가 처음 나타난 것도 그 막달라 마리아였으며(마태 28:8-10, 요한 20, 1-18, 누가 24:10), 예수 수난과 부활의 증인도 여성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의 역할이 현대에 이르러서 무시되고 만 것이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성처녀 아그네스의 생존연대에 비하면 약 300년이나 앞선 인물이지만 그녀와 더불어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해 왔으며, 화가들의 주된 작품소재를 제공했다.
그녀는 행실이 나쁜 창녀로 그려지고 있지만 보라지네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예루살렘 근처의 막달라성을 소유했던 귀족출신의 여인이었다.
막달라는 ‘성벽’을 뜻하는 히브리어로 서기 70년경 로마군에 의해 함락될 때 약 4만 여명이 거주했으며 6천 명은 죽고 나머지 3만 여명은 노예로 팔려간 곳이다.
보라지네의 기록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성벽이란 뜻의 막달로 성씨를 갖고 있는 귀족의 후손으로 고귀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키로스, 어머니는 유케리스였고 남동생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가 있었다.

서규석 씨는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자치경영개발원에 재직하면서 대학에서 문명사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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