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뫼르소가 비웃은 가짜 ‘인지상정’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김창현 칼럼] 뫼르소가 비웃은 가짜 ‘인지상정’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승인 2018.04.23 1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은 짧은 길이에 비하여 상당히 난해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프랑스령 알제리에

서 벌어지는 프랑스인에 의한 아랍인 살해사건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어머니가 죽었는데 여자친구와 놀러 가고, 갑자기 아랍인과 시비가 붙어 살인을 하고, 범행을 추궁하는 검사 앞에서도 당당함을 보여주는 기인이다.

처음 이방인을 읽었을 때 뫼르소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었는데 왜 슬픔에 빠져 있지 않은 거지? 대체 왜 아랍인을 죽인 거지? 대체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지? 이 의문을 해결하고 싶어 ‘이방인’을 몇 번이나 줄을 쳐가며 다시 읽었다.

햇빛이 눈 부셔서 총을 쐈다는 뫼르소의 설명은 사실일까? 어머니가 죽으면 당연히 슬퍼해야 하고, 형벌을 주는 검사 앞에서는 비굴해야 한다는 것은 소위, ‘인지상정’이다. 까뮈는 뫼르소의 행동을 통해서 ‘인지상정’이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이와 같은 딜레마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존 쿳시의 ‘추락’에서도 나타난다. 이 소설의 배경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차별정책이 폐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쁜 아프리칸과 착한 백인을 보게 된다.

인종차별 정책을 떠올리면 으레 백인이 지배인이며 가해자이고, 아프리칸이 피지배인이며 피해자일 것만 같다. 그러나 적어도 표면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는 뒤바뀌어 있다.

약탈과 강간을 일삼는 아프리칸은 종종 인종차별정책의 핑계를 대기도 한다.
즉, 오랜 인종차별정책의 반대급부로 우리의 폭력은 정당방위라는 논리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설명이 범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아메리카 대륙 상인들에게 도매급으로 노예로 팔려 나갔던 아프리칸의 슬픈 역사를 떠올려보면 그냥 흘려 들을 수 만은 없는 주장이다. 요컨대 피해자와 가해자가 항상 그렇게 명징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해방 이후 반세기 이상 우리의 주적이었던 북한은 핵 실험장폐기를 선언했다. 이 조치는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이 화해무드를 조성하고 뒤통수를 칠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도 있다.

그러나 “한 번 적은 영원한 적”, “과거가 미래에도 그대로 반복될 것”이라는 기계적 인과론은 까뮈와 쿳시가 소설에서 그토록 반대했던 가짜 ‘인지상정’의 논리에 불과하다.
중요한 시기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연한 전략적 사고이다.

4월 27일에 열리기로 되어 있는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마무리되기를 기원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