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죄가 되어 죽어가는 청년세대
가난이 죄가 되어 죽어가는 청년세대
  • 탄탄스님
  • 승인 2018.06.12 11: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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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사회의 자화상은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부정적이고 어두운 구석을 들추어 본다면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하니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청년세대의 극단적 선택이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으며 불안장애와 공황장애 환자도 20대의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는 최근의 보도가 있었다. 대학생의 74.5%가 불안 증상에 대한 잠재위험군에 속하며 대학생 약 2600여 명의 심리건강 및 대학생활 적응 실태를 조사한 결과인데 전체 응답자 중 대부분이 우울 증상을 경험하고 있으며, 특히 14.3%는 ‘자살 위기 잠재위험군’에 속하고, 100명 중 1.6명은 최근 1년 이내에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통계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울이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라 고 단정할 순 없지만 우울한 사람이 자살할 확률도 높은 건 사실이다. 삼성서울·서울대·분당서울대병원 공동연구팀의 연구자료에 따르면 우울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자살 위험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우울해졌을까? 우선 과도한 경쟁 끝에 찾아오는 허무함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어렵게 취업을 한 후에 스트레스가 더욱 컸다고도 한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지만, 대학 내내 취업 걱정만 하며 살아야 했고 그때부터 자꾸 사람들을 멀리하고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취업을 하고 나면 진짜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회사에서는 젊은이들을 착취하듯이 ‘열정페이’를 강요하기도 한다. 견디어 보려고 가짜 웃음을 짓고 있으려니 이미 다 소진된 인생 같기도 할 것이다.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집단 안에 조용히 머물길 원하는 사회구조에서 다른 사람과는 친화력 있고, 타인에게 관심도 많지만, 정작 자신과는 별로 가깝지 않으며 스스로를 부정하며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길 원하는 세대, 이렇게 청년의 우울함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부실한 사회안전망은 또 어떠한가? 여전히 한국에서는 ‘가난’이 자살의 이유 중 하나이다. 말하자면 가난이 죄가 되어 죽는다고 하니 과연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만한 충분한 이유이지 싶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논하는 이 시대에 적어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 죽음을 택하는 불행한 일만은 막아야 한다.

그러나 10~20대의 자살률은 전년보다 소폭 증가하였다. 최근 5년간의 추이를 보면 노인층의 자살률은 크게 줄었는데, 청년층은 큰 변화가 없다. 한국의 10~30대의 사망 원인인 1위는 자살이고 특히 20대는 전체 사망 원인에서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반에 이르며 20대에 사망하는 사람의 대략 둘 중 하나는 자살로 죽는다는 불행한 현실에 종교도 지역 사회도 국가도 손을 놓고 있으니 이보다 암담한 현실이 없다.

대부분의 자살 동기는 ‘정신과적 질병 문제’가 비중이 가장 컸다고 하는데 ‘경제생활 문제, 육체적 질병 문제’가 그 뒤를 이었다. 정신과적 질병이라고 하면 대표적으로 우울증이 떠오르는데, 최근 이 우울증 환자가 크게 늘고 있다. 우울증으로 진료를 받고 있는 환자가 수십만 명씩 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떠하든 이러한 어두운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는 건 분명하다. 120년 전 『자살론』을 쓴 에밀 뒤르켐은 자살의 원인을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 찾았다. 이유가 개인에 있든 사회에 있든, 자살을 막는 게 개인의 몫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려면 먼저 어른들의 반성이 필요하다. 왜 아이들을 치열한 경쟁의 전장으로 내몰았는지, 꿈을 묻지 않고 꿈을 강요했는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다그쳤는지, 비타민은 챙겨 먹이면서 왜 마음의 상처는 돌보지 않았는지 진정성을 지니고 돌아보아야 한다. 자살을 남의 아들·딸의 일로 제쳐놓진 않았는지, ‘약해빠진 것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치부하진 않았는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현재가 싫으니 과거에 얽매이는 법이다. 속마음 깊은 곳에 깔린 희망 없는 미래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경제적 이유와 관계가 깊다. 소득은 정체되었고, 자산 증식은 쉽지 않으며, 양극화는 사실상 해결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 치솟는 집값을 추격하는 건 어느 사이에 엄청난 도전이 돼 버렸다. 좀 힘들어도 미래가 나을 것이란 확신이 있으면 희망이 있겠지만, 지금은 평범해 보여도 꿈꾸기 어려운 시대라고들 말한다.

실제로 지난 3월 통계청이 발표한 ‘2017 사회지표’에 따르면 한국 국민 중 평생 노력할 경우 본인 세대에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23.1%에 불과하다. 자식 세대에서의 계층 이동 가능성에 대해서도 ‘높다’는 응답은 30.6%밖에 안 된다는 통계가 있다.

대체 한국사회의 어두운 이면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8년 사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계층 이동의 가능성은 더욱 어려운 현실이 되어간다. 좀 더 세분화해 보면 젊을수록, 소득이 적을수록, 본인의 사회적 계층이 낮다고 생각할수록, 이동 가능성을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픈 사람은 아프다고 말을 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마음의 상처는 공개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치유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 어느 시절보다 더 많은 사람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떠나 보내는 이시대에 우리는 절망에 전염되지 않도록, 견디며 현실의 고통을 함께 극복해야 한다.

서로의 아픔에 이웃의 고통에 무심하지 말자.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는 모두 자살 생존자이지 않은가? 주변을 제대로 도우려면 제대로 된 사회적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러한 불행한 시대에는 종교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고 역시 기관의 제도적 장치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현실은 씁쓸할 뿐이다.

년째 ‘자살 1등국’의 멍에에도 실질적인 노력은 부족했던 것이 기정사실이다. 지난해까지 중앙부처에 자살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단 2명뿐, 하지만 이것도 자살만 전담한 것도 아니다. 지역 관가에도 자살예방정책과가 신설되었으며 인원도 늘렸다고 하지만, 조금 숨통이 트인 정도이지 선진국과 비교하면 턱없이 작은 규모이다. 연간 자살 예방 예산도 고작 162억 원이다. 한 해에 7500억 원을 자살 예방에 쏟아붓는 일본에 비하면 부끄러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그중에 다섯명 중 한 명은 젊은 청춘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꼭 대형 사고가 터져야만 지키는 게 아니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결코 아픈 사람을 혼자 두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청춘들이여! 알고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어느 염세적 철학가가 인생은 고통을 수반 하기에 살 가치도 없는 허무한 세상이라며 기름진 음식에 고급 와인잔을 기울리며 미인들과질펀한 파티를 즐기고 있을 그 시간, 그의 독설과 괴변의 저작물이 헌책방의 먼지에 쌓여 있을 때 그 하찮은 저작물을 탐독하고 인생을 포기하려 고뇌할 때에도,그 늙은 염세적 철학자는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입으로만 염세를 하였지 사실은 천수를 다하였다고 하는 넌센스가 있다. 인생은 간혹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세상은 살아보면 쓴맛 단맛 다 맛보고 살아야 늙어서는 추억이라도 있는 것이다.

젊은 날 의 고뇌와 비애도 결국은 찰나일 뿐이다. 눈 깜짝할 사이의 찰나의 일 뿐이니, 참고 인내하며 세월을 이기면 좀 더 한가해 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부모세대도 젊은 날의 비애와 고뇌과 가난을 견디며 굳세게 살아 중년과 노년을 맞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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