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뜨랑제의 SNS미술관] 바람의 미소-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에뜨랑제의 SNS미술관] 바람의 미소-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김기옥 사유담 이사
  • 승인 2018.06.12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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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 .

[김기옥 사유담 이사] 이상하다.
웃는 듯, 우는 듯, 기쁜 듯, 슬픈 듯 하지만 애절하게 우아한 부처님은 가히 백제의 얼굴이라고 할 만했다.

사람의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어렵다. 모두 다 사람의 모습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무기나 용을 만드는것이 쉬운 작업이었다. 아무도 못봤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기형에는 투박함이 묻어있다. 몸체 대비 손의 크기가 너무 크고 단순화시킨 옷 표현이 섬세하지못하다. 특히 다리 길이가 아쉽다.

머리에 아미타불의 보관을 쓰고 있으면 아미타불을 대신해 세상에 오신 화신, 틀림없는 관음보살이다. 한 손에는 작은 구슬을 들고 한 손으로는 가운을 살짝 들고 오목한 연화대좌위에 서있다. 동으로 만들어 금옷을 입혔으나 세월에 금빛 옷은 흩어져버려 부처님의 얼굴과 온몸은 누덕누덕했다. 화장이 번지고 마스카라가 흘러내린 시상식의 여배우같지만 추하지 않다.

압권은 그 표정이었다. 통통한 볼을 가지고 계신 부처님은 번진 화장을 뚫고 웃고 계신다. 측면에서 올려다보면 턱선에 어우려져 신비함까지 감돈다. 더러운 저수지에 피어난 연꽃처럼 그렇게 순수하다. 그러나 단순히 웃는다고 표현할 수가 없다.

금속에 담을 수 없을 것같은 입술 위의 미소, 흐르지도 않고 왠지 맺혀서 아른아른할 것같은 눈물 고인 눈빛, 세상 시련 혼자 맞이한 듯한 낯빛을 가지고 편안하다.

그래서 기쁘고, 아프고, 서럽고, 귀한 느낌이 동시에 다가왔나보다.
난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아니면 빌어야 할까?
애매해서 뵐 때마다 혼자 묻곤 한다.
"저는 어느 시점에 어떤 마음으로 서있어야 할까요. 부처님 "

 

[에필로그] 형이 보고싶은 부처님

1907년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같던 그 해, 부여 규암리에서 농부가 솥 하나를 발견했다. 솥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두 분의 부처님이 누워 계셨다. 언뜻 보니 큰 전쟁을 피해 감추어 놓은 것같았다.

금빛 부처님이 어찌나 찬란한 지 오래도록 눈을 둘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 소식은 소문을 타고 서울까지 올라갔고 통감부는 주인을 찾는다며 압수해갔다.

28센티의 형 부처님과 21센티의 동생 부처님이라고 불리운 두 분 부처님은 1년 뒤 니와세 하쿠쇼(庭瀨博章)에게 팔렸다. 다시 큰 불상은 이찌다 지로에게 팔려나갔다. 백제 최고 전성기에 만들어진 부처님은 그 고운 자태와 신비한 모습으로 유물 좀 안다는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니와세가 하도 자랑을 하고 다녀서 니와세 부처님이라 불렸다.

큰형 부처님은 명성이 일본까지 밀려가 반출돼 버렸고 동생만 남게 되었다. 니와세는 부처님의 몸값을 올리려 철저하게 팔지 않고 들고 있었기에 해방을 맞이한 후 한국박물관으로 돌아왔다.
바로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이었다.

백제가 사라져도 지키려 했던 부처님은 그렇게 백제의 미소가 되었다. 함께 계셨다는 형부처님의 자태가 궁금한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문화재청에는 1970년으로 출토연대가 나와있어 전화까지 해서 확인했다. 부여박물관에도 전화해서 현황을 알려드렸다. 내가 요즘 이렇게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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