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민(窮民)의 노릇, 민초(民草)의 희망
궁민(窮民)의 노릇, 민초(民草)의 희망
  • 탄탄스님
  • 승인 2018.08.2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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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나라 안팎으로 권력자들과 관련된 뉴스들은 초미의 관심사다. 거의 기담(奇譚)에 가까운 보도를 접할 무렵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가끔은 만나지는 어떤 이가 “도대체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야 현명하게 지혜롭게 낙심하지 않고 사는 것인가?”하고 묻기에 “정치에도 세상사에도 큰 열정조차 지닌 사람이 아니어서 그저 입단속, 아랫도리단속, 문단속 잘하고 몸조심하며 나날을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하고 농반진반으로 답변을 해주었다.

정치로부터는 거리를 두는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소시민들에게 이 나라의 권력자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아주 심각한 고민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함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요즘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이 나라 최고의 권력은 단순하게 정치적인 의미에서만의 최고위층이 아니라, 사람들 심정의 깊이에 자리한 이른바 커다란 상징이기도 하고 정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삶의 큰 테두리를 신뢰할 만한 것이 되게 하는 데,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곧 최고권력이라는 말을 새삼 되풀이하여 새기게 된다.

우리네 일상에서의 삶이란 하찮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큰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고, 아침이면 뜨고 저녁이면 지는 해도 나날의 삶에서 지표가 되는 일이며,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어김없이 궤도를 돌고 있어야 그 증표가 작동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이 또한 나날의 삶이며 일상이지만, 이러한 것을 의식하고 헤아리면서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만약에 어떠한 정책의 오류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생긴다고 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갈팡질팡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에 떨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권력자들이 정점에서 하는 권력투쟁이며 정치 체제에서 이와 비슷하게 삶의 안정을 뒤흔드는, 혹은 불안케 하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실상은 정치의 상징성은 제왕제에도 늘상 정권찬탈과 체제전복의 위험성으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고 본다. 사람들과 우연히 주고받은 대화에서 표현되고 있는 일련의 일들, 무의식의 깊이에 있던 어떤 신앙에 큰 타격을 입은 결과는 정치체제가 어떠한 상징적 역할을 제대로 해야하고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투명하고 무엇보다 정의롭고 공평한 것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여 주는 것이다.

시민들의 무의식에 그러한 정치 체제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지만, 오직 권력안보와 정권지속이 권력을 지닌 그네들이 말하는 안정이라고 한다. 그것은 다시 구체적인 의미에서 ‘삶의 안정’과도 연결되고 있으며, 권력자의 정책이나 결정은 일상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뒤틀어 놓을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고용, 노동조건, 소득, 재산, 부동산, 건강, 교육, 복지, 사회보장, 세금과 공공요금, 삶의 인프라 이러한 것들은 그 권력의 힘 아래서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으며 바뀔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 것이 정부와 관료 체제이고, 지방자치정부이다. 그러한 체제를 움직이는 사령탑에 앉아 있는 존재가 이 나라 권력자들이다.

이러한 체제에서 거의 완전하게 신앙적인 차원에서 사회 안전망이 보장되어야 하며 사람들은 이러한 기대를 지니고 있는 것이 곧 삶의 안정이기도 하다. 권력이 흔들리는 것은 시민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이며 그것은 삶의 세부에까지 미치면서 작용하는 삶의 조건을 뒤흔드는 것 이기도 하다.

이미 정치는 일상적 잡사에까지 미치는 힘이면서 동시에 일상의 잡동사니를 초월하는 어떤 정연한 공간이고 투명함을 구성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잡다한 일상사에서 삶의 위엄을 그 나름으로 직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체제의 공간이다. 정치체제 공간에서의 위엄의 소멸은 이미 세계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민주화의 한 효과가 그러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여러 발언들, 성희롱의 대상이 된 여성, 인종, 이민자 이러한 사항에 대한 조롱하는듯한 발언도 공공공간(트윗)에서 드러내어 말하지 않아야 할 말들이고 정치인의 품위가 질적으로 하락 하였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사례이다.

인간세상의 현실은 말하기 좋아하고 어떠한 권력 체제에서든 감정과 이성이 병립하기 마련이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원조국인 미국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이 성희롱과 관련해 ‘그것을 당했다는 여성이 그럴 만큼 매력적인 여자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는 덜떨어진 보도가 있었다.

사적인 개인의 언어에 법과 공공 윤리의 관점에서 엄정하게 처리되려면 이성적이고 투명한 공공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되겠지만, 최근에는 권력이 오히려 시민을 너무 피로하게 한다.

시민이 권력을 걱정하고 권력은 시민에게 행패를 부리는 듯 작용한다. 시민은 권력에 사로잡힌 마음에 도피의 환상이 일어날 지경이다. 이 환상은 권력이 너무 강한 정치 체제에서는 많은 이들이 예로부터 가져온 것일 것이다. 권력자들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함으로 인하여 이제는 시민탈퇴조차 신중히 고려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대통령이 도지사가 시장이 군수가 지닌 권력이 한시적으로 잠시 맡겨진 권력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지난날의 절대권력인 왕정체제처럼 영구하다면 얼마나 시민 노릇 하기가 버거웠을까? 오직 표로 권력의 횡포를 심판할 권한을 지닌 궁색한 궁민(窮民)인 민초에게도 이렇게 희망은 있는 것이다.

수행자가 기도하며 사는 방법으로 자연 속의 은거(隱居)를 가장 높이 생각했다. 그러나 자연에서 사는 데에도, 필수적인 것은 역시 의식주(衣食住)이다. 그 중에도 제일 중요한 것은 식(食)이다.

사람을 낚아가려는 부패한 권력의 그물 소위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찬 강 위에 홀로 낚시하는 어부의 이미지는 시에서나 그림에서나 흔히 보는 모티프다. 소동파(蘇東坡)도 ‘어만자(魚蠻子)’라는 시에서 자연 속에 완전히 독립하여 사는 어부를 주제로 한다.

시의 주인공 어만자는 강 위에 배를 띄우고, 배를 집으로 하여 아이들을 기르고, 물고기를 잡아 양식을 마련한다. 밭을 갈 필요도 없지만, 세금을 낼 필요도 없다. 동파는 말한다.

“인생행로에는 어려움도 많다. 토지를 밟고 살면 부역과 세금을 짊어져야 하는데, 땅 밟고 사는 것은 어만자처럼 물결을 타고 허공에 뜨는 것만 못하다.”

토지에 사는 삶에서는 부역과 세금 이외에도 사람을 낚아가려는 정치, 부패한 권력의 그물이 편재한다. 송나라 시절에서도 물에 사는 것은 이것을 피해 사는 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어느 대학 교수의 저서에 『국민으로부터의 탈퇴』라는 것이 있다. 이 책의 제목과 관련하여 어떤 사람들의 심정을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높은 삶의 차원으로서의 맑은 공공질서, 또 그보다 더 높은 정신의 초월적 질서에 대한 숨은 소망도 없앨 수 없는 사람의 본성에 속하리라. 어수선한 국내 정치 상황을 직시하며 시민은 다음 선거에서 어떠한 선택을 할지 필자는 자못 궁금하기가 성급하여진다. 성미가 급하니 벌써 몇 년 후에나 있을 선거 판도가 염려가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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