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짧은 상념 –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부쳐
죽음에 대한 짧은 상념 –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부쳐
  • 탄탄스님
  • 승인 2018.08.2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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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탄탄스님(여진선원 주지, 용인대 객원교수)

월명은 일찍이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며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낸다. 이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전(紙錢)을 서쪽으로 날려 없어지게 하는데, 애끓는 향가는 계속 이어진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죽은 누이 노자 삼게 하고
피리는 밝은 달 일깨워 항아(姮娥)가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萬德花)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삼국유사》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이다.

향가(鄕歌)는 향찰(鄕札), 즉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한 정형시가인데, 신라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창작되어 널리 불렸다고 한다. 중국 시가와는 달리 우리나라 고유의 시가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또는 신라가요, 신라시가라고도 부르며 4구체, 8구체, 10구체 등 세 가지 형식이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는 모두 25수인데, 그중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지은 균여 스님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향가 작품이 남아있는 이가 신라 경덕왕 때의 월명(月明, 생몰년 미상) 스님이다. 다시 한번 더 음미하여 본다면,

생사의 길 여기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간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
아, 미타찰에서 너를 만날 나는 도 닦으며 기다리련다

형제를 한 가지에 난 나뭇잎에, 죽음을 가을철 지는 낙엽에 비유하며 누이동생이 극락왕생하기를 애닯게 기원한 이 노래가 월명의 ‘제망매가(祭亡妹歌)’이다.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갑자기 광풍이 일어 종이돈이 서쪽으로 날아갔다”《삼국유사》 제7 감통편 ‘월명사도솔가(月明師兜率歌)’,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이 향가는 친근한 비유와 애절한 시상 전개로 현재 전하는 향가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적절한 시어 선택과 표현법으로 국문학자들로부터 “서정시다운 서정시가 충담사와 더불어 월명에게서 처음으로 비롯됐다”, “순수 서정시로서 지평을 열어주는 노래”라는 최고의 평가를 받기도 한 이러한 향가를 지은 월명 스님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경덕왕이 기도문을 올리라고 하자 월명은 “향가만 알 뿐 범성(梵聲)에는 익숙치 못합니다”라는 기록도 전한다.

우리나라에 범패가 들어온 시기는 9세기 초반 즈음으로 추정하는데 진감선사 혜소 스님이 흥덕왕 5년(830)에 당에서 돌아와 “옥천사(玉泉寺, 쌍계사)에서 수많은 제자들에게 범패를 가르쳤다”는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문(眞鑑禪師大空塔碑文)’에 따른다.

경덕왕 대에 월명 스님이 “범성에 익숙치 않다”고 대답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경덕왕 당시에도 이미 범패를 부를 줄 아는, 범패를 전문으로 하는 승려가 따로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으며 월명을 경덕왕시절에 살던 승려임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삼국유사》에서는 ‘제망매가’가 지어진 슬픈 사연을 담고 있는며, 그시대 월명이 죽은 누이의 영혼을 위로하며 지은 향가라고 하며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도 어디로 가는지, 언제 가는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며, 월명은 언젠가 극락에서 누이를 만날 것이라 믿기에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다고 다짐을 한다는 애절한 구절이다.

월명은 누이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에 나기를 기원하지만, 들숨날숨의 호흡지간에 목숨이 달려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은 분리돼 있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월명은 죽은 누이를 통해 자신의 죽음 또한 직시하고 있는것이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나”라고 하며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죽음을 형상화한다.

월명은 마냥 슬퍼하지만도 않는다. 아미타부처님의 회상에서 다시 누이를 만날 것을 기약하며 슬픔을 불교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어디에서 태어나 온 것이며
죽어 어디로 가는가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
뜬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가 없나니
태어남과 죽음도 모두 이와 같다네

이 시구는 나옹 스님의 누님이 동생인 나옹에게 염불을 배우고 깨달은 바 있어 읊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함허득통 스님이 원경왕의 태후 천도를 위하여 설한 법어라고 하기도 하며, 서산대사의 임종게라고도 한다. 어찌 되었든 본래의 명문에 첨삭이 있고 변형은 있어왔지만 잘 다듬어져 현재는 불교의 의식집인 ‘석문의범’에 영가법문으로 수록되어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인간도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다.

‘중연생기(衆緣生起)’에 의한 ‘오온가화합(五蘊假和合)’의 존재로 인연에 따라 오고 간다고 한다. 위의 게송은 이러한 불교의 생사관을 구름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 ‘뜬구름’의 영가법문 또한 되새겨 보면 죽음에 대하여 이토록 담박할 수 없다.

하지만 결코 가볍게 죽음을 다루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 인연 따라 모였던 지수화풍 사대(四大)와 심식(心識)이 제각기 흩어지더라도 일생 동안 ‘그가’ 지은 업은 남겨진다. 스스로 지은 별업(別業)이나, 더불어 지은 공업(共業)이나, 또 다른 인연을 만나 그렇게 다시 ‘한 조각 뜬 구름(一片浮雲)’을 만들 것이다.

그러하니 뜬 구름에 비유했다 하여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깨우침에 이르지 못한 범부 중생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처럼 더한 아픔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의 하나이며 팔고(八苦) 중 하나인 애별이고(愛別離苦)의 아픔은 가슴 저리다.

우리네 인생 순간마다 살아서 헤어지고 죽어서 헤어지는 수많은 이별을 겪으며 살아가야 한다. 부모 형제 자매나 친구, 친지와의 영원한 이별이 언제 닥쳐올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세상에 태어난 이상 떠나야 하는 것은 인간 누구나의 숙명이며 그 이별을 담담하게 이겨 내야 하는 것 또한 삶의 이치이지만, 오늘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남과 북의 가족들의 사연 또한 눈물겹다.

헤어지며 통일을 기약하고, 영원한 이별이 되면 죽어서 다음 생에라도 보자면 슬퍼하며 헤어져야 하는 그들의 아픔은 동시대 동업중생들의 슬픔이 아닐 수 없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데, 부모 부부와 자식 형제 자매 조카들의 슬픈 생이별을 바라보며 그깟 이념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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