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본질’, 대학의 ‘변질’
공부의 ‘본질’, 대학의 ‘변질’
  • 탄탄스님
  • 승인 2019.03.1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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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자장암 감원, 동국대 강사)

새 학기를 맞고도 벌써 몇 주가 지나고 있다. 모교에서 강의를 한 지 10년도 훨씬 넘었고, 그동안 해마다 새내기들을 늘상 보아왔지만, 사뭇 그 느낌은 해마다 달라지는 듯하다. 초롱초롱했던 예전의 눈빛은 찾을 수 없고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아이들의 표정이 역력하다. 대학에 진학하며 동아리 모임에 전력하고, 시대를 아파하던 지식인의 모습, 진리의 전당인 상아탑의 예전 모습은 더이상 찾을 길이 요원하다.

지난날 장년 세대가 다니던 옛 시절의 낭만은 더욱 찾을 수 없고, 이젠 대학의 기능이 학업보다 취직을 위한 직업교육기관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 뿐이다. 날이 갈수록 대학에서 진정한 공부를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기예와 기술습득이 우선시 되는 것 같아 씁쓸함이 깃든다.

공부란 사전적 의미는 학문과 기술을 닦는 일이다. 공부는 본래 공부(功扶)를 의미했으며, 그 뜻과 형태가 축약되어 현재 공부(工夫)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본래 공(功)은 ‘성취하다’, 부(扶)는 ‘돕는다’는 뜻으로 ‘무엇을 도와 성취하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일본어에서의 공부(工夫)는 무엇을 요리조리 궁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수단이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을 뜻하며, 현대 중국어에서는 기술자가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기술을 발휘할 때 ‘공부가 대단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분야에서 달인이 되어 능수능란하게 잘한다고 할 때, 탁월한 전문가 또는 달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을 공부라고 한다면 중국 무술을 가르치는 ‘쿵후’는 이런 공부의 의미가 축소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전문가 수준으로 단련하는 공부의 집약적 수련과정을 보여준다.

정명도(程明道)가 “동문수학하는 벗들과 토론하고 강습(講習)함에 서로를 관찰하면서 좋은 공부가 많은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朋友講習 更莫如相觀而善工夫多)라는 《근사록(近思錄)》 ‘위학’ 한 구절에서도 공부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서로를 관찰하면서 좋은 공부가 많은 것’은 《예기(禮記)》 학기(學記)의 학문하는 네 가지 방법 가운데 마(摩)에서 유래한다.

네 가지 방법은 ‘예(豫), 시(時), 손(孫), 마(摩)’이다. 예(豫)는 미리 공부하여 잘못을 미연에 방지하는 마음을 의미하며, 시(時)는 목적에 맞게 공부하여 때에 적절하게 깨달음을 얻음이다. 손(孫)은 상황에 맞게 공부하여 본분과 능력을 무리하게 넘지 않음이고, 마(摩)는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며 공부하여 서로 본받으며 선을 닦아가는 것이다.

공부는 이처럼 ‘끊임없이 서로를 본받으며 선을 닦아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진호(陳澔)는 “예컨대 갑의 선을 칭찬하면 을이 보고서 본받고, 을이 칭찬할 만한 선이 있으면 갑 또한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서의 공부(工夫)는 학문(學問), 곧 ‘배우다(學)’ 또는 ‘학문을 실천하다(爲學)’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학(學)이 앎과 실천력을 추구하는 배움 자체를 의미한다면, 위학(爲學)은 그 배움을 목표로 한 실천 또는 배움의 실제를 뜻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학이시습(學而時習)’이라는 한 마디로 공부를 대변했다. 주자(朱子)는 《대학장구(大學章句)》 서(序)에서 “열다섯이 되면 … 태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했다. 태학에서는 이치를 궁구하고(窮理), 마음을 바르게 하고(正心), 몸을 닦고(修己), 사람을 다스리는(治人) 법을 가르쳤다”고 했다.

이러한 유학적 의미와 공부가 지니는 일상적 의미를 종합하여 본다면 공부란 배우고 학문을 실천하며 나아가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의미를 포괄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부는 ‘일상생활 속에서 배움을 실천하여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몸을 수련한다면 ‘몸 공부’라고 하고, 마음을 보고 마음을 닦아간다면 ‘마음 공부’ 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배우고 실천하여 탁월한 능력을 얻어가는 모든 노력의 과정을 말하고 인간의 삶에서 자신의 목표에 따라 자신을 연마하고 승화시켜나가는 모든 활동을 공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공부가 재미없는 건 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책 읽고 글 읽는 것이 공부에서 가장 중요할 것인가? 주자는 《주자어류》에서 “책을 읽는 것은 배우는 사람에게 두 번째 일이다(讀書乃學者第二事)”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무엇인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배우는 것이다. 동·서양 공히 가장 본질적인 공부로 꼽는 것이 위기지학(爲己之學), 곧 자기를 세우는 공부다. 이것과 대비되는 것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爲人之學), 다시 말해 스펙을 쌓으려는 공부다. 물론 입시나 취업이 걸려 있는 만큼 이런 공부를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주자는 위기지학에 70%, 위인지학에 30%가량을 할애하라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도 공부의 본질은 위기지학인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되, 동·서양에서 모두 강조한 것이 ‘소리 내어 읽기’이다. 요즘은 묵독이 보편화 되어 있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았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고 안중근 의사께서도 말씀하셨다. 왜 눈곱이 낀다고 하지 않고 가시가 돋는다고 했겠나. 당시의 공부는 귀로 들으면서 하는 공부(廳讀)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의 중세 수도원에서도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고전을 외우고, 이를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그러지 않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옛 사람들은 알았던 것이다. 지금도 사람을 사람답게 형성시키는 텍스트는 소리 내어 외우는 게 좋다고 본다.

또한 공부란 정보를 습득하고 책만 읽는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 자전거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자전거의 구조에 대해 아무리 상세한 설명을 듣는다 한들 자전거를 탈 수 있나? 아니다. 직접 올라타서 페달을 밟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넘어지고 다치기도 하면서 자전거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듀이는 ‘행함으로써 배운다’고 했다. 뭔가 배우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실행(practice)이 필요하다. 실행을 하다 보면 결국 내가 바뀐다. ‘자전거 보는 사람’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다음에는 즐거움(enjoyment)이 따라온다. 이 단계가 되면 “공부가 쉬워” 내지 “맛있어”, “재밌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고 한다. 그러기에 결국 공부가 재미없는 건 내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며, 인생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생도 힘들고 어렵지만 이 단계를 거치고 나면 “인생도 선물이야” 하면서 감사할 수 있게 되고 이 단계가 되면 공부가 더이상 경쟁이 아니라 즐기는 것,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될 터이다.

불교적 의미에서의 공부를 본다면 상구보리(上求菩提)하는 모든 과정의 활동을 의미하며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모든 노력을 말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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