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알람브라의 추억 Ⅰ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알람브라의 추억 Ⅰ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승인 2019.04.2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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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탑에서 바라본 성벽.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살다보면 운명의 장난과 같은 때를 종종 접하곤 한다. 흔히 그런 상황을 반어적이다 하여 아이러니컬 ironical 하다고 표현한다. 그라나다의 알람브라에 가면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이러한 아이러니로 꽉 차 있다. 무엇때문에 그럴까.

일단 스페인 역사의 단면을 잠시 보자.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에게 8세기에 땅을 빼앗긴 스페인은 이후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국토회복운동 Reconquista (레꽁끼스따)을 전개한다. 치열하게 서로 뺏고 빼앗기는 과정 중 최후의 보루로 남은 곳이 그라나다이고, 그 곳에 자리잡은 궁전이 바로 알람브라이다. 참고로, 영어는 알함브라지만, 스페인어는 h가 묵음이기에 알람브라 라고 부른다.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인 보압딜 (본명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12세)은 1492년 1월 2일 마침내 페르난도와 이사벨, 두 카톨릭 왕과 여왕 부부에게 그라나다의 열쇠를 넘겨줌으로 지난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단순히 인종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지배, 피지배의 관계를 넘어 한 공동체를 이루는 문화와 관습의 근원인 언어와 종교가 달랐기에, 그들의 전쟁은 오랜 시간 목숨을 걸어온 투쟁 그 자체였다. 스페인은 국토수복 이후 이교도인 이슬람의 유산을 철저히 파괴했다. 지금의 대성당의 자리는 거의 예외없이 과거 이슬람 사원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그럼에도 그런 대대적인 철거작업을 면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그라나다이다. 비록 원수의 것이었지만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차마 손을 대지 못했던 점을 보면, 문화의 위대함은 무력 마저도 꿇게 만드는 저력이 있다는 점에 새삼 놀라게 된다.

한 때는 벽돌 한장, 문짝 하나 남김 없이 다시는 이교도의 싹을 틔우지 못하도록 가루를 내어 철저히 없앴다. 지금에 와서는 행여나 그 벽돌에 금이라도 갈까, 문짝이 떨어지기 라도 할까 하여 입장객의 수까지 제한을 두어 철저히 관리하고, 수시로 개보수 작업을 통해 어떻게든 다시 아랍의 찬란했던 건축물과 장식물을 회복시키려 하니, 역사의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스페인의 이런 노력은 현대판 문화재 회복운동이라고 봐야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까를로스 5세 궁전 내부.

알람브라를 이루고 있는 건축물 중엔 이슬람 색채를 완전히 배재한 것도 있다. 바로 까를로스 5세 궁전. 이슬람의 시대가 끝났음을 천명하듯 그 곳에 있던 건물을 허물고 미켈란젤로의 제자를 들여와 르네상스 양식을 적용해 1층엔 도리아식, 2층엔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장식을 한 곳인데, 정작 이렇게 정성을 들여 자기들의 조상이 지은 곳은 별다른 관리 없이 개방되어 있다.

오히려 까를로스 5세 궁전 바로 옆에 있는 나스르 정원이나 맞은 편에 위치한 알까사바 성벽은 표 검사부터 시작해서 가방 메는 위치와 셀카봉 사용금지까지 따라다니며 시시콜콜 주의를 주는 관리인이 있는데. 이건 무슨 역설인가.

알까사바에 가 보면 감시탑 (Torre de la Vela 또레 델라 벨라)이 있다. 그곳에 올라보면 시에라 네바다 산부터 해서 그라나다 시내 전경과 알바이신 지구까지 다 둘러볼 수가 있어 알람브라에 갈 때마다 놓치지 않고 가본다. 오륙백 년 전의 상황을 잠시 떠올려 보자. 이곳은 감시탑이다. 알람브라 건축을 염두했을 때 제일 먼저 지은 곳이다. 궁전보다 왜 이런 탑부터 먼저 지으려 했을까.

이슬람의 입장에선 언제 카톨릭 연합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여기저기 카톨릭 왕국에 탈환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저들의 등골은 서늘했을까. 동시에 이슬람 왕의 권위로서 높고 높은 이 곳에서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지녔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라나다를 담아두기에 제일 좋은 전망대가 되었다. 아이러니 아닌가.

나스르 궁전 내부 - 아라야네스 정원.
나스르 궁전 내부 - 아라야네스 정원.
나스르 궁전 내부 - 사자의 정원 회랑.
나스르 궁전 내부 - 사자의 정원 회랑.

인생은 살면 살아갈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게 훨씬 더 많다는 걸 깨닫는다. 혈기 넘치던 청년 때엔 내가 아는게 다인 것만 같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아 멋모르고 세상을 내 틀 안에서 재단하고 평가하고 재확인한다. 육백년 전 무어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천이삼백년 전 서고트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전에 로마인들의 확신은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겹겹이 쌓인 시간의 역사는 유산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그 어느 것도 영원한 것은 없음을. 그렇기에 역설로 가득찬 세상에서 나는 겸손해져야 함을, 겸손할 때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알람브라는 내게 말해주고 있고, 그렇게 나는 바로 지금의 추억을 만들었다.

김덕현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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