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알람브라의 추억 Ⅱ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알람브라의 추억 Ⅱ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승인 2019.05.02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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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 전경.
알람브라 전경.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알람브라 라는 거대한 숲에서 각 건물마다 개성있는 나무를 본다. 건물마다 새겨진 이야기를 들어보고 갖가지 조각과 문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살피다 보면, 하루도 짧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낮시간 동안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 알람브라에서 나는 아랍의 술탄이었다가, 합스부르크의 황제도 되어보고, 감상에 젖은 기타리스트도 되면서 한껏 기분을 내본다.

종일 걸어도 싫증 나지 않을 이 곳에서 어느새 문닫을 시간이 되어 그만 나가달라는 방송이 나오면, 이제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자 알람브라를 보는 산 니콜라스 전망대로 발길을 옮겨본다. 전망대까지 가는 길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모로코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찻집으로 잠시 이곳이 스페인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갖가지 장식품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고, 묘한 분위기의 음악은 귓가를 건드리며 플라멩코를 연상케 한다. 여기에 가게 안팎에 매달린 가죽제품의 냄새는 불과 엊그제 다녀온 모로코 페스의 잊을 수 없는 향취(라 쓰고 분뇨라 읽는다)를 다시 불러 들인다.

높은 담벼락, 꼬불꼬불하고도 좁은 길, 여기에 울퉁불퉁한 돌바닥, 그 곳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오르내리고 있다. 온통 하얗게 칠해진 집들은 그 집이 그 집 같아 헷갈릴 정도다. 어찌보면 그냥 우리가 살던 동네 산책길일 수도 있는데, 이 곳과 이 길이 전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이, 여기를 마냥 지나치지 못하고 의미를 더 만들어 주는 느낌이다.

알바이신 지구 전경.

남산 한옥마을은 찾아가는 길이라도 편한데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지구는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더 기를 쓰고 찾아가고 싶게 만든다. 경사길을 올라가다 보면 문득 아주 현실적인 생각도 든다. 여기 주민들은 불편해서 어떻게 사나, 인터넷 주문 배달은 가능할까, 이사는 대체 어떻게 하지 등등. 정작 이곳에 자리 잡고 사는 사람들 원래부터 그러려니 하고 적응하는데, 외지인만 오지랍 넓게 걱정을 대신 사서 하고 있다.

길을 걷다보니 타일에 까르멘Carmen이 자주 등장한다. 오페라 까르멘도 아니고 대체 무엇일까. 바로 아랍어 카름Karm 에서 나온 단어로, 원뜻은 포도밭이었다. 뜨거운 사막의 땅에서 포도, 레몬, 오렌지 등의 작물을 키운다는 건 아무나 못하는 일이었다. 물이 너무나도 귀했기에 정원을 두어 꾸미고 산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사치였던 것이다.

어느 정도 넉넉한 살림이어야 집 앞에 물을 대고 자그마한 텃밭이라도 가꾸어 각종 과수목을 심어 집안 가득 향을 채우려 했던 아랍인들의 풍습이 스페인에 그대로 전수되었다. 담은 높이 쌓아 외부와 단절하지만, 안으로 일단 손님을 맞이해 들이면 그야말로 가진 것 모두 보여주고 내주는 저들의 문화가 오백년도 지난 지금까지 내려왔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다.

진한 과일꽃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니 기분좋은 어지러움이 밀려온다. 하늘은 석양으로 물들어 가고, 집주인의 식사 초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와 수다의 경계를 넘나든다. 알람브라 맥주와 상그리아가 오고가며 적당한 취기가 올라오는 때에, 은은히 붉게 타오르는 알람브라가 맞은 편에 나를 마주하고 있다. 차마 글로 다 표현 못할 황홀경 그 자체다.

무수한 까르멘의 집과 음식점을 지나 마침내 산 니콜라스 전망대에 도착해 보니, 이미 이곳을 찾아든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저마다 붉게 타오르는 알람브라를 사진에 담아보며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인생샷으로 열심히 건져보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얼른 촬영하기가 쉽지 않다.

알람브라 야경.
알람브라 야경.

맞다, 여긴 그라나다였다. 처음부터 얼른, 서둘러, 빨리빨리란 단어는 사전에 없는 곳이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기다려 본다. 그냥 찍으려니 어두워서 잘 안 나온다. 여행의 매력은 처음 만난 사람과도 바로 친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도움을 요청하니 흔쾌히 도와준다. 서로 사진을 찍어 주고 어디서 왔나요, 한 번 물어본다. 어색함이 바로 누그러진다. 그러면서 이곳 알람브라의 추억이 자리잡는다. 그리고 사람을 통해 비로소 추억이 시작된다.

사진으로 담아보고 미처 사진에 담지 못한 부분은 다시 마음의 창인 눈으로 담아본다. 시간은 흘러 다시 오지 않으나, 추억은 남아 절대 떠나지 않는다. 프랑스 비평가 생트 뵈브의 말에 나는 함께한 분들과의 만남으로 알람브라의 추억에 또다른 의미를 남겨두었다.

김덕현 Steve.
김덕현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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