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오감의 호사, 세비야 대성당 Ⅲ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오감의 호사, 세비야 대성당 Ⅲ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승인 2019.06.1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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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염시태-무리요.
무염시태-무리요.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휘황찬란 하다는 표현만으로는 2% 부족하다 느껴지는 세비야 대성당의 내부 성가대 뒷편에서 각종 예술품과 같은 조각과 회화, 성물을 보며 아득해 지던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바닥에 누군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관이 새겨져 있다. 살펴보니 콜럼버스의 아들, 에르난도 콜론 (페르디난드 콜럼버스)의 무덤이었다. 탐험가인 아버지의 위업을 세세히 기록으로 남겨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세비야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참고로 그의 형 디에고도 같이 세비야 대성당에 안치되었으니, 이태리 출신의 콜럼버스 가문이 스페인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다.

아버지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나라에 따라 극과 극을 이룰 정도로 다르다. 1992년 리들리 스콧 감독은 <1492 낙원의 정복> 이란 영화를 올렸는데, 우리나라에선 <1492 콜럼버스>로 알려져 있다. 상영 당시 영화 광고는 영웅인가, 약탈자인가로 그에 대한 양분화된 시선을 소개해 준바 있다. 아들의 입장에서 아버지가 구술해 주는 내용을 적으며 다시 곱씹어 보았을 그는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아울러 기록으로, 자료로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도 되새김질 해 보게 된다.

콜럼버스의 관.
콜럼버스의 관.

발걸음을 옮겨 콜럼버스의 무덤이 있다는 곳에 가보니, 엄숙해야 할 성당에서 나름의 재치를 보게 된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곳을 인도라 믿었던 콜럼버스는 (그래서 더 이상 미국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부르지 않지만, 서인도 제도 라는 말은 여전히 지도에 남아있다.) 이사벨 여왕의 사후 험난한 고초를 겪었던 바, 절대로 스페인 땅에 묻히지 않겠다며 유언을 남겼다. 스페인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난 그를 당시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그의 유해는 산토 도밍고와 쿠바를 거쳐갔다.

그러다 스페인에 귀환하게 되었는데, 묻지 말라던 유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아예 공중에 띄운 그들의 생각은 진지함과 (본의 아니게) 유머러스함을 둘 다 갖고 있다. 앞 뒤 두 명씩 네 명이 관을 맨 그 와중에도 상징성은 다 갖추고 있다. 앞에 당당한 두 인물은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의 휘장을 두르고 있다. 적극 후원해 주고 교류했던 이사벨 여왕의 왕국이다.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 쫙 편 가슴, 해상왕국의 노, 기독교 왕국임을 천명하는 십자가, 전쟁에 쓰인 창, 창 끝에 찍힌 석류(석류는 스페인어로 그라나다 라 한다, 즉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을 정복했음을 의미한다). 딱 봐도 폼생폼사다. 뒤에 둘은 콜럼버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아라곤과 나바라 왕국으로, 왕국의 휘장을 두른 인물들이 고개를 떨군채 관을 떠받들고 있다.

한편, 콜럼버스의 관 옆에는 여행자의 수호성인인 크리스토발 (영어로 크리스토퍼) 성인이 크게 그려져 있다. 동명이인인 두 분을 놓고 여행자로 평생을 살아온 분과 그런 여행자의 평안을 지켜주는 성인을 어울리게 하고 여행객을 맞이하다니, 여행자에게 이보다 더한 배려도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예수님의 가시면류관 성체현시대.
예수님의 가시면류관 성체현시대.

넓은 본당을 지나 우측으로 들어가 보니 은으로 만든 화려한 아르페 성궤와 성인들의 유골 일부를 모셔놓은 성물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쓰셨다 하는 가시 면류관의 조각이 담긴 성체현시대를 만나볼 수 있다. 가시 면류관 전체도 아닌 극히 일부 하나를 보려면 세상 경건한 자세로 무릎까지 꿇어야 한다. 하나만 있기에 망정이지 만일 생베 조각 마저 있었더라면 슬개골이 나갈 뻔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맞은 편에는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을 통합하고, 1248년 세비야를 무슬림에게서 탈환했으며, 스페인의 역대 왕 중 유일하게 성인의 칭호를 받은 성 페르난도 3세의 상이 서 있다. 오로지 성경 인물만을 보는 다른 성당과는 다르게 세비야 대성당에서는 유명인의 상이며, 그림, 심지어 무덤과 관까지 본다는 점이 무척 색다르다. 여기서도 앞서 치맛바람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황당하면서도 나름 말이 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다름 아닌 페르난도 3세의 왕권을 상징하는 구(球)를 두고 축구공으로 여겨 축구의 수호성인이라 칭해진다니, 사람들은 다들 저마다 듣고 싶은 말을 듣기 마련인가 보다.

수없이 나오는 문턱들을 조심하며 길을 따라가 보니, 원형의 벽을 붉은 천으로 고급스럽게 두른 참사회의실이 나온다. 고위 사제들의 회의장소였던 이곳에 주재를 맡은 분의 위를 올려다보니, 무리요의 성화, 무염시태(無染始胎)의 성모가 자애롭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벨라스케스와는 달리 세비야에서만 평생을 살며 종교화에 전념했던 그의 역작이 보는 모든 이들의 힘든 삶을 매만지며 위로해 주고 있었다. 무염시태의 반대편엔 세비야의 수호성녀인 루피나와 유스타 (또는 후스타)가 지켜보고 있다. 3세기 세비야에서 그들의 도기를 이교도의 제사 용기로 쓰게 팔라는 걸 거절했다는 이유로 순교한 후, 한참이 지난 18세기 중반 지진이 일어나던 당시에 두 분의 환영이 나타나 성당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해서 세비야의 수호성녀로 지정이 되었다. (세비야 기차역명이 그래서 후스타 역이다.)

성모마리아 관.
성모마리아 순금의 관.

마지막으로 성물실에 들어서자 금과 은으로 된 온갖 성물들에 벌어진 입은 다물 줄을 모른다. 그 중에서도 성모 마리아 상 위에 씌우는 순금의 관에 세상 모든 보석을 다 소환한 듯 빼곡히 박혀 있는 왕관 앞에서 다들 부러움일지 탄식일지 모를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 옆에 있는 아기예수에게 씌우는 관도 마찬가지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오감의 호사를 누린 세비야 대성당. 종교적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화려하고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마리아, 예수, 성인, 성녀, 콜럼버스… 그 영향력은 수백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변치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에게 소개되면서 그 이상의 사람을 유입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오감의 호사를 맛본 자여, 어떤 영감을 얻었고, 그 감흥을 어떻게 일상의 삶에 투영하려는가. 세비야의 대성당은 지금도 황홀함을 넘어 깊은 여운이 남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덕현
김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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