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뜨랑제의 SNS 미술관] 마르가리타 공주- 벨라스케스
[에뜨랑제의 SNS 미술관] 마르가리타 공주- 벨라스케스
  • 김기옥 사유담 이사
  • 승인 2019.07.09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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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옥 사유담 이사]  벨라스케스의 뮤즈였다. 펠리페4세는 13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열살을 넘긴것은 겨우 세명이었다. 어렵게 얻은 마르가리타 공주는 눈처럼 하얀얼굴에 파란 눈동자와 금발을 가진 금세기 최고의 미모로 태어났다.

존재만으로도 고귀한 아기씨는 아버지 펠리페4세의 기쁨이었다. 손이 귀하기로 유명한 합스브르크가문은 귀한핏줄을 이어가다가 망했다고 볼 수있다. 고결한 혈통을 보호한다고 가족끼리결혼해서 유전병으로 죽어가게 된 것이다(신라의 성골이 사라진것도 근친혼 때문이었다).

펠리페 4세는 자신의 며느리 내정자였던 마리아나와 결혼했다. 아들과 첫 부인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무려 30살의 나이차이가 났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꽃같은 마르가리타 공주는 건강하고 사랑스러웠다.

태어난 다음해에 엄마의 동생이자 자신의 사촌인 레오폴드 1세와 약혼했다. 또다른 죽음의 커넥션이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레오폴트1세는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자식의 색시가 너무 보고싶었고  고민하다가 초상화를 생각해냈다. 때마침 스페인 궁전에는 초상화 천재 벨라스케스가 있었고 벨라스케스는 마르가리타 공주를 그려 비엔나로 보냈다. 세살, 다섯살 , 여덟살 공주는 그림 속에서 자라났다.

왕과 친구처럼 의지하던 벨라스케스에게도 마르가리타 공주는 애틋했다. 어찌나 귀하게 그려냈는지 단박에 거대한 미술관에 던져놔도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는  누구든 찾을 수 있다. 비엔나에서 웃고있는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아기밖에 없다는 말은 미술관에 들어가면 알 수있다. 공주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공주도 피는 못 속이고 합스브르크 주걱턱이 시작되었다. 메부리코와 주걱턱은 합스부르크가문의 유전병이었다. 벨라스케스는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 공주의 옆모습을 담거나 한쪽으로 치우치게 그리는 트릭을 썼다.

초록 드레스 그림 속에는 미래의 남편이 보낸 모피를 들고 서있기도 하다. 선물을 보내고 그 답례로 그림에 선물을 닮아서 보내는꽁냥꽁냥이 나쁘지 않다. 그러다가 1660년 벨라스케스가 죽는다. 마지막 해에도 공주를 그리다가 떠났고 마무리는 사위였던 마조가 이어간다. 어설픈 핑크드레스가 그것이다. 스케치를 하고 아마도 벨라스케스가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벨라스케스의 것과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1666년에는 아버지 펠리페4세도 떠난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공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1세와 결혼하면서 비엔나로 가게 된다. 11살이나 많은 삼촌이자 사촌이자 남편은 다정했다. 금슬이 좋아 그렇게 네 아이를 낳았으나 겨우 한 아이만 살아남아 공주의 손을 잡고 그림속에있다. 그러나 마르가리타 공주는 얼마살지 못한다. 겨우 결혼 6년이 채 안되는 어느날 다섯번 째 아이를 유산하고 21살 한참 나이에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자태는 그림속 에 남아있다. 나는 벨라스케스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법을 알고 있다. 바로 눈빛이었다. 우수에 차있는 듯 슬퍼보이지만 기품있고 담담한 눈빛을 찾았다면 그가 벨라스케스의 주인공이다.

마르가리타 공주가 그렇다. 벌써 400년이 지나가지만 공주의 안타까운 사정은 지금도 회자되어 라벨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작곡하였다. 파반느는 공작이 걷는 우아한 발걸음을 나타내는 무곡이었다. 화려하지만 끝내 높이 날지 못했던 여왕과 잘 어울려보였다.

#피자아님 #마르가리타 #벨라스케스 #역변 #사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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