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하루 다섯끼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하루 다섯끼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 승인 2019.10.0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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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대표음식 빠에야
스페인의 대표음식 빠에야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아침부터 더위를 느끼다 한낮엔 타들어 가듯 내리쬐던 햇살이 차츰 따스한 볕으로 바뀌어 간다. 마침 따뜻한 바람에 커피의 그윽한 향이 자꾸만 묻어오니 여기에 케잌 한 조각이면 굳이 밥을 안 먹어도 만족스러울 것 같다. 다만 두어 시간 후 또 먹게 된다는게 함정. 아,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찾아왔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삼시세끼의 식문화가 정착된건 실은 얼마되지 않는다. 아침 저녁이란 뜻의 조석만이 있었을 뿐이고 그 사이에 먹는건 새참이었다. 점심은 말 그대로 마음에 점을 찍는 정도로만 간단히 먹는 거였으니, 조상님들이 작금의 먹방 영상을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스페인 사람들은 하루에 무려 다섯 끼를 먹는다. 그렇다고 매 끼니마다 푸짐히 차려 먹는게 아니라 간단하게 자주 먹는 편이다. 아무래도 평균 해발고도가 600미터 이상인지라 조금만 먹어도 배부름을 느끼게 되는 환경의 영향이 작용한 듯 싶다.

이베리아 반도의 다섯끼 식단을 알아보자. 일단 아침 8~9시 경에 먹는 desayuno (데사유노)는 토마토를 바른 빵 (pan con tomate 빤 꼰 또마떼) 에 우유커피 (café con leche 까페 꼰 레체) 정도로 간단히 해결한다. 우리는 새벽부터 일어나자마자 밥을 먹고 출근길에 오르지만, 이 친구들은 하루를 느지막이 시작하니 아침을 먹고 왔을리가 만무하다. 집이 아닌 회사에 와서 일단 자리에 가방을 던져 두고 노트북을 켠 다음 근처 까페나 빵집에서 당당히 아침을 먹는 건 스페인 어디에서건 쉽게 보는 광경 중 하나다.

간단히 먹고 가벼운 수다와 진지한 업무회의 경계에서 쉴새 없이 말이 오가며 일을 하다 보니 금새 배가 꺼지고 만다. 그래서 오전 11시 경에 우리로 치면 아점에 해당하는 almuerzo (알무에르쏘)를 먹을 차례가 된다. 아침 식사처럼 다시 간단히 샌드위치 (bocadillo 보까디요)와 쥬스와 같은 음료 한 잔을 한다. 종종 이 단어는 오찬 내지는 점심 자체로 쓰이기도 한다.

이렇게 먹으니 우리나라나 다른 유럽의 국가처럼 12시나 오후 한 시에 점심을 먹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곳 사람들에게 점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점심을 뜻하는 comida (꼬미다) 란 단어는 아예 음식이자 식사를 뜻하는 말로 쓰일 정도이다. 그 뿐 아니라 '점심을 먹다' 란 동사 comer (꼬메르) 역시 일반적으로 '식사하다'는 뜻으로도 사용되니, 이들에게 점심시간은 그만큼 중요하고 우리보다 긴 시간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하여 점심 시간은 보통 회사에선 한시간 반 정도, 학교는 두 시간 정도의 시간을 가진다. 먹는 양 자체가 많아서라기 보다는 워낙에 서빙부터가 느리고, 먹을 때도 양 손을 다 써서 일일이 본인이 썰고 집어서 넣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게 당연지사다. 또한 이들은 절대 조용히 먹는 법이 없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업무 얘기는 잠시 뒤로 한다. 대신 이미 다녀왔거나 앞으로 갈 휴가 얘기는 언제나 좋은 대화거리가 된다. 학생들의 경우엔 일찌감치 먹고 남는 시간엔 체력을 다 소진할만큼 원없이 논다. 그러니 다시 잡념없이 다시 공부에 집중할 환경이 조성되는 건 덤이다.

무려 한 시간 반이나 되는 시간이라 해도 현지인에겐 밥 한끼 겨우 먹을 정도 밖에 안 된다. 우리에게 그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면 어떤 양상을 보일까. 밥을 국에 훌훌 말아 마셔 버릴 정도로 속전속결로 마치는 터에 점심시간을 단지 밥만 먹으며 보내 버리기엔 너무나 아깝지 않을까.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 들고 산책 한바퀴 돌고, 사무실에 돌아와 이를 닦고, 자기 자리로 가 온라인 강의 수업까지 들어가며 자기계발에 쓰고도 남는 시간 웹서핑과 소셜 미디어를 확인하지 않을까. 아, 이미 기존의 한 시간 내에서도 충분히 그렇게 활용하고 있었다고. 세상에, 지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다 해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다시 현지인 모드로 돌아가 두 시부터 세 시 반 정도까지 배를 천천히 채우고, 자리로 돌아와 다시 업무 조금 보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실업률이 높아진 때부턴 스페인에서도 상사의 눈치를 봐가며 일을 더 하는 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현지인은 소리 없이 사라져지는 경우가 많다. 퇴근 후 6~7시 경에 다시 간단한 식사를 하는데, 우리에겐 일반적인 저녁 식사 시간이지만 이들에겐 간식시간이다. 그래서 이름도 정말 "간식 merienda (메리엔다)" 라고 부른다. 재미난 건 간식이라고 해서 꼭 빵이나 샐러드류를 먹는게 아니라 파스타와 같은 완전한 한끼 역할을 하는 조리음식도 간식으로 친다는 사실. 어쩌면 이들의 위산 분비는 우리의 몇 배에 달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니 저녁은 늘상 9시서부터 시작한다. 스페인에 살면서 제일 힘든 점이 바로 가족과 저녁 외식시간을 맞추는 일이다. 밤 9시까지 기다리자니 배가 고프고, 그 전에 조금 먹고 가자니 기분이 안 난다. 그래서 나온 해결책이 평일 외식엔 그나마 일찍 8시에 열어주는 식당에 가서 얼른 먹고, 주말 외식 땐 아침부터 현지식 식사시간 대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Steve kim

금요일 밤 9시 넘어 야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 근처 식당가에 가 보면 식당은 그제서야 삼대가 모이기 시작하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9시에 먹는게 어른은 그렇다 쳐도 어린 아이에겐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애들이 먹다 얼마 안 되어 잔다. 하지만 어른들은 애들을 재우면서 본인들의 대화를 이어간다. 대화로 풀고 수다로 정을 나누며 유쾌한 그들을 보면 가족애가 어떤건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이들에게 식사란 밥 한끼를 넘어서는 말이었다. 기력을 회복한다는 뜻 re-staurer 에서 레스토랑이 나왔듯이 이들은 같이 먹고 마시며 나누는 대화 속에 신체뿐 아니라 삶의 의미도 돌아보고 있었다. 실은 우리도 먹는게 너무도 중요해서 밥 먹었는지가 인사말을 대신하고 가족을 일컬어 식구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외식이든 집밥이든 혼밥이 일상화되어 가는 요즘, '함께'의 따뜻함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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