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진솔한 만남과 정성어린 식사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진솔한 만남과 정성어린 식사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승인 2019.10.0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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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 고기
어린양 고기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직업의 특성상 많은 사람을 대면하고 밖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 만남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으며, 다시 만나기 어려운 줄 알면서도 애를 써서라도 붙잡고 싶은 인연도 있다. 열에 아홉은 상대방보다 내가 더 간절히 원해서 그런 시간을 갖자고 하는 편이지만, 뜻밖의 행운으로 귀한 초대를 받는 경우도 있다. 주든지 받든지 일단 진솔함을 갖추는 경우, 만나서 식사 한 번 같이 하시죠 라며 말을 건내게 된다. 서로 시간을 맞추어 보고 그 날 그 시간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그 때까지의 기다림처럼 시간이 더디가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고대하는 마음으로 마주한 자리에서 나누는 한끼의 식사에서는 서로의 인생이 음악이 되어 귓가에 맴돌고, 가슴의 창을 수놓으며 흘러간다. 각자 다른 생을 살아온 사람이 만나 예상치 못한 이야기의 강으로 전개하는 가운데 서로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장이 바로 식탁 위에서 꽃을 피운다.

바르셀로나의 길목마다 빼곡히 들어찬 식당 중에 미슐랭 스타, 오리아 Oria 에서의 만남과 식사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식당 내부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여느 유럽 식당과 종업원에게서 느낄 수 없는 친절, 그러나 과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은 응대가 긴장했던 기분을 풀어준다. 미슐랭 식당의 경험은 실내악 전악장을 듣는 것이자 수필 한편을 보는 것과도 같다. 기승전결이 있고 눈길이 닿는 모든 것에 자신의 정체성이 배어 있다. 이제 불혹을 넘어선 나는 얼마나 나답고 나스럽게 정체성을 담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식당은 내가 주인이 되지만, 이곳은 셰프가 주인다. 그가 그 날에 가장 걸맞는 메뉴를 구상하고 혼을 실어 그릇에 담아낸다. 손님인 나는 그의 작품을 눈으로 감상하고 귀로 신선한 소리를 들으며 비강으로 향에 취하고 마침내 입안 혀에서 식감의 미묘함을 즐겨본다.

적절한 밝기의 조명은 대화의 소리를 조절하는 스위치처럼 과장되게 얘기 하지 않아도 상대에게 전달이 잘 되게 하며, 간간이 자연스런 웃음이 어우러져 만남과 식사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 몰입의 시작을 상큼한 로제 와인에서 맛본다. 와인잔은 장밋빛 인생을 담고 알싸함이 깃든 마늘 크림의 홍합과 어우러져 몸 속에 식사를 받아들일 신호탄을 쏴 올린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곡물로 만든 빵들은 진초록의 올리브 오일에 그 향미를 더 풍성히 하고 명태살의 바삭한 비스킷과 감자의 부드러운 슈크림은 입안의 풍미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전채 요리
전채 요리

이어 나오는 전식의 서주. 매번 음식이 나올 때마다 종업원의 간결한 설명이 한껏 더 맛있어 보이게 한다. 접시의 8/9은 여백의 미. 내가 아는 스페인은 이렇지 않은데… 이런 때만큼은 스페인도 아시아권의 미학을 공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여백의 미가 가득한 전채에 뒤이어 나온 송로버섯 리조또는 하얀 거품치즈와 함께 고소하고도 짭조름한 맛을 품어 맛봉오리에 알려준다.

한층 더 바삭한 타피오카는 살살 녹아드는 대구살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뒤이어 나온 어린양 고기의 부드러움은 비단결로도 부족한듯 혀를 단숨에 사로잡는다. 옆의 돼지고기 경단은 이 날의 숨겨진 조연. 이렇게 나오는 접시 덕에 입안은 연신 환호와 환희가 터지는 축제의 장이 되었다.

대구와 타피오카
대구와 타피오카

오이와 멜론은 진토닉과의 궁합으로 지친 미각을 시원하게 씻어주고, 망고젤리는 극강의 당도를 선보이며 화려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코코넛 샤벳은 망고 편린과 함께 후식의 변주를 꾀하고 작디 작은 딸기는 시각의 유혹을 선사한다. 여기에 마멀레이드 순무까지 가세하니 한끼의 식사에서 눈은 혹사당할 정도로 호강을 누려본다.

작은 접시인데도 자주 나와서 그런지 속은 든든함을 넘어 조금은 힘들다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다행히 본식까지는 문제없이 마쳤다. 

후식
후식

어느새 후식 순서이다. 카카오는 쵸코가 되고, 다시 쵸코는 빵, 크림, 가루, 샤벳으로 다양한 탈바꿈을 꾀하고 있다. 셰프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는가 보다.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는 사람 찾아 보기가 쉽진 않을텐데, 험난한 과정을 거친만큼 본인의 일에서 즐거움과 행복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추가로, 카라멜이 덧입혀진 호박씨는 그 고소함이 그토록 달달한 초콜렛의 달달함에도 그 맛을 잃지 않는다.

마지막의 코코넛 마시멜로우는 이어지는 초코렛의 쉬임없는 등장에도 잊을 수 없는 질감을 선사해 주었다. 이 날의 대미는 물방울 초콜렛.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물이 되어 흐를 것 같아 애지중지하며 입안에 넣어본다. 길고도 긴 정성가득한 한 끼의 식사를 마치니, 새삼 깨닫는게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는 이렇게나 사소한 것을 두고도 이토록 마음을 쓰는데, 정작 더 꼼꼼하게 신경쓰고 챙겨봐야 할 내 삶을 어떻게 다루었었나. 얼마나 간절함을 두고 수시로 돌아보며 성찰하고 있었는가 하며 말이다.

Steve kim

식사 속에 타인의 인생을 듣고 음식 속에 자아의 생애를 돌아본다. 한 번의 식사는 내 삶의 끈을 이어가는 과정이자 함께한 인간의 전 생애가 몰려오는 거대한 파도였다.

좋은 만남을 정리하고 함께 숙소로 향하는 길, 최근 보수 공사를 마친 가우디의 까사 바뜨요가 우리를 한층 더 환히 비춰준다. 진솔한 만남 가운데 가져보는 정성어린 식사 한 끼는 그 자체로 행복이다. 오늘밤 오리아 Oria는 내게 만남과 식사를 통해 보다 풍성해진 인생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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