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여긴 어디요, 까사 바뜨요 Ⅰ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여긴 어디요, 까사 바뜨요 Ⅰ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승인 2019.11.06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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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 아마뜨예르(왼쪽), 까사 바뜨요.
까사 아마뜨예르(왼쪽), 까사 바뜨요.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지금 이곳은 바르셀로나의 청담인 그라시아 거리. 길거리에는 중저가 브랜드서부터 고가의 명품에 이르기까지 매장의 스펙트럼이 한껏 펼쳐 있다. 거리의 행인들은 매장의 진열품에서 쉬이 눈길을 떼지 못하고 몇 걸음 가다 기웃거리며 지갑 사정을 살펴보곤 한다. ‘아, 저정도면 괜찮게네’ 하게끔 가격이 나와 있지만, 일부 상당한 고가의 매장은 상품만 한 두개를 두었을 뿐, 가격은 아예 달아놓지도 않는다.

당신이 얼마를 상상하건 그 이상의 숫자를 보여주겠다는 심산. 감당할 자에게만, 그것도 부담스럽게 직접 손으로 문을 열어주는 보안경비대를 뒤로하고 들어와 콧대높은 직원에게 감히 물어볼 때에만 비로소 알 수 있다는 저들의 고도의 심리적 계산은, 돈의 기능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해 궁극에 가서는 잘 산다는 것의 의미까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대체 난 누구고 여긴 어디길래 이 즐거운 여행 도중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된 건가.

먹고 사니즘의 생계형 질문에서 해방된 이른바 부르주아의 고민은 스페인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현대 유럽 문명의 바탕을 이룬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된 메디치 가문의 효과랄까. 바르셀로나의 부호들 또한 그저 비싸고 멋진 옷에 화려한 치장으로만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건 그 자체로 천박하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회화작품을 수집하기엔 외부에서 그걸 굳이 방문해서 보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 공간의 제약이 있었고, 악단의 음악은 연주가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는 시간의 예술이기에 보관할 방법이 없었다.

까사 바뜨요 야경.
까사 바뜨요 야경.

개인을 넘어 자신의 가문을 대대손손 어디에서건 멀리서부터 알아볼 수 있게 알릴 지상 최고의 방법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가 집대성된 건축물을 남기는 것. 그렇게 20세기 초반의 바르셀로나에서는 저마다 마르지 않는 쩐의 화수분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다 싶은 집안마다 경쟁을 했다. 집을 짓되 그저 기거하는 터의 수준을 넘어 하나의 테마가 있고, 스토리가 이어지며, 저택의 안팎에서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벌였다. 그들의 의도를 건축가 마다 정확히 파악하여 설계와 시공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가우디의 까사 바뜨요는 그렇게 탄생한다. 바뜨요 가문에서는 자신의 집 바로 옆에 맞닿은 아마뜨예르 가문의 집이 건축가 푸이그 이 카다팔크를 통해 너무도 멋지게 나온 것을 보았다. 이들은 사촌이 땅을 산다 해서 배가 아플 건 없지만, 나보다 별 잘날게 없어 보이던 동네 이웃이 나보다 잘 나간다는 건 속이 뒤집어질 일이었다. 1900년 초콜릿 공장장 아마뜨예르 씨의 멋들어진 집을 보고, 바뜨요 가문은 당시에 한창 주가를 올리던 가우디에게 1904년 재건축을 맡긴다. 부자 3대 못간다고, 직물업의 바뜨요 씨의 집은 초콜릿 공장의 아마뜨예르를 넘었지만 90년이 지난 1994년 사탕 공장 공장장인 츄파춥스 회장가문인 베르나트 씨에게로 넘겨지고 만다.

이후 최근 올해 들어 보수 공사를 마친 바뜨요의 집은 더 예뻐지고 화려해졌다. 낮에는 낮대로 형형색색의 파스텔톤의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타일이 동화의 나라에 온듯한 기분을 내준다. 그러다 밤이되면 화사한 조명이 낮보다 더 예쁜 환상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나 예쁘기만한 까사 바뜨요의 별명이 뼈의 집 casa dels ossos 이라는걸 알면 네? 왜 때문이죠? 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성 조르디의 전설이 담긴 이 집에 들어가려 했는데, 투어를 시작도 하기 전에 이렇게나 얘깃거리가 많았다. 이제 진짜로 들어가서 하나씩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Steve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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