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마오쩌둥(毛澤東)의 실패
독재자 마오쩌둥(毛澤東)의 실패
  • 탄탄스님
  • 승인 2019.12.0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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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동국대 강사)
탄탄스님(동국대 강사)

철없는 애송이 홍위병들이 중국의 구시대적 문화유산을 제거하고 정부 내의 부르주아적 요소를 축출하는데 앞장서며 스스로 새로운 혁명가인 듯 도취되어 수백만이 베이징(北京)으로 집결하였다.

각 지역의 당 지도자들은 물론 교사 및 학교 지도자, 지식인, 그리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고 공격하며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중국 전역에 걸쳐 촌락과 도시, 성 등의 기존 당체제를 전복했던 이들 홍위병 조직은 곧 자기들끼리 다투기 시작했고 서로 자기들이야말로 모택동 사상의 진정한 대변자라며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나 조직 내분은 더욱 증가하여 산업생산은 중단되고 도시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급기야 중앙 정부는 홍위병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길 권유한다.

이는 모택동 독재시대가 낳은 실책이며 더욱 점입가경이었던 인류 최악의 참사인 대약진운동 때의 일인데, 농촌을 순방 중에 참새떼를 노려보며 모택동이 한 마디를 한다. “저 새는 해로운 새다. 인민의 식량도 부족한데 참새가 귀중한 곡식을 쪼아 먹는다.”

공산혁명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최고 지도자의 이 한 마디는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고야 말았다. ‘참새 섬멸 총지휘부’가 만들어졌다. 얼치기 지식인과 행동대원들이 바람을 잡고 국영 연구 기관에서는 “참새 1마리가 매년 곡식 2.4kg을 먹어 치운다”며 크게 목청을 높였다. 참새만 박멸하여도 70만여 명이 먹을 곡식을 더 수확할 수 있다며 모택동의 혜안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방방곡곡에서 소탕작전이 벌어졌고 참새는 이리저리 쫓겨서 날다가 지쳐 떨어질 정도로 10억 인구가 종일토록 냄비와 세숫대야를 두드리며 쫓아 다녔다. “이건 아니다”라는 사람도 없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마오의 명령은 일사분란하게 실행이 되고, 참새는 멸종에 이르렀다.

이젠 곡식 수확량이 늘어날 일만 남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참새들이 사라지자 메뚜기를 비롯하여 해충이 창궐하고 농작물은 초토화되었으니 여기서 끝났으면 오죽할까만, 그 다음 해 농사에 문외한 모택동이 궁여지책으로 벼를 빽빽하게 심도록 지시한 또 한 번의 패착이 있었으니, 벼와 벼 간격을 최소화하면 소출량이 더 늘어날 것으로 판단하여 어리석은 결정을 시행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촘촘히 벼를 심으면 서로 성장을 방해하고 병충해에 더욱 취약해지며 아예 낟알이 여물지 못한다.

결국은 절대 권력자가 즉흥적으로 내놓은 식량증산 계획의 완전한 실패로 굶어 죽은 사람이 1000만 명이라고 당에서 발표했지만 실제 사망자는 최대 4000만 명에 이른다.

모택동의 한 마디에서 출발한 참화가 현대의 우리사회에도 교훈하는 바 크다. 정권이 바뀌고 교육부 장관이 교체될 때마다 바뀌는 즉흥적인 정책도 그러한 예라고 본다. 권력자의 말 한 마디에 오두방정을 떨다 보면 국가적 재앙이 발생되기 마련이다.
중요 정책들에 대하여 얼치기 관료와 행정가들이 전문기관의 검증도 없이 윗사람의 말 한 마디에 맹종하는 상황을 보면 모택동과 참새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방 정부의 선출직 시장이나 구청장들이 당선만 되고 나면 권위주의적이고 재정을 사유화하며 시민이 자기 수하인 줄 착각을 하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데 많은 문제가 있다.

우리 근대사에서도 수십 년 후 나타난 재앙에 가까운 실책을 든다면, 제3공화국 박정희의 ‘산아제한 정책’ 또한 완전한 실패작이었음이다. 조루 정책인 산아제한정책은 이제야 생산인구의 감소와 인구의 고령화로 많은 문제를 안은 정책이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듯, 즉흥적인 결정으로 실패한 정책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는 고통이다.

이 시대에도 권력을 남발하며 오만스런 독재자가 또 있다면 가혹하게 타도하는 것, 이제 온전히 우리의 몫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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