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인생은 5분, ‘찰나(刹那)’의 시간
[기고] 인생은 5분, ‘찰나(刹那)’의 시간
  • 탄탄스님
  • 승인 2020.02.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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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용인대 객원교수)
탄탄스님(용인대 객원교수)

흘러간 세월, 즉 지나간 시간의 집합체가 인생이다. 어제의 시간은 지금 기억하는 것이므로 상상에 불과하며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는 시간도 지금이고 지금을 생각하는 시간도 지금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는 시간을 스쳐 지나지 않은 과거는 없으며, 기억도 없고 미래도 없는 법이며, 집약적인 불교적 관점에서의 시간관은 오직 찰나인 지금의 실다운 시간 진실한 시간으로 보는 것이며, 이 지금이 실제적 인생이니 시간의 실체를 파악하여 진면목을 깨닫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고단한 수행을 하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시간을 찰나라고 하며, 찰나에 생각한 것이 사라지면 과거가 되고, 찰나가 모여진 것이 세월이며, 곧 세월은 찰나이고 지금 기억하거나 상상하는 것이니, 찰나인 지금에 세월이 들어있다는 것이 되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천억만 겁이 흐를지라도 지금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과거나 미래는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고 상상이나 추억이므로 실제가 아니며 다시는 돌아올 수도 없고 미리 당겨올 수도 없다.

그러므로 가장 실다운 시간, 실감나는 시간이란 꼬집어서 아픔을 느끼는 지금만이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며 변하지 않는 진실한 시간이다. 고통도 지금 느낀 것이고 고민도 지금 하며 즐거움도 역시 그러하니 지금만 올바르게 지나가면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이니 과거도 행복으로 쌓이게 되므로 인생이 행복으로 꾸며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직시해야 할 것은 생각이 없으면 시간이 없는 것이지만 생각 자체가 물질적이거나 생명이 있는 생물이 아니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생각에 의하여 느껴지는 시간도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꿈과 같은 환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길고 긴 인생도 환상과 같은 정신이 없다면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도 역시 정신이 없으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모두가 정신에게만 느껴지는 환상이니 인생 자체가 환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에 지금은 시간의 기준점이 되고 기준점은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가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아주 짧은 시간을 찰나(刹那)라고 하며 염경(念頃)이라 번역했다. 시간의 가장 최소 단위를 말함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제136권에 의하면, 1찰나는 75분의 1초, 즉 0.013초이다. 또 손가락을 한 번 튀기는 순간에 64찰나가 지난다고 한다.

찰나가 쌓여 우리네 일생, 삶이 되는 것이니 이 찰나가 간혹 기적을 만든다. 혹은 찰나가 운명을 바꾸기도 하며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찰나에 결정된다.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500m 스피드스케이트 경기 때 차민규가 34초 42 올림픽 신기록으로 경기를 마치는 순간 우승을 확신한 이들이 환호하며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를 쳤지만, 바로 뒷조의 노르웨이 호바르 로렌첸이 34초 41로 들어왔다. 0.01초 빠른 것이다. 0.01초 차로 로렌첸은 영광스러운 우승자가 되었고 2등으로 밀려난 차민수는 허탈하여 말을 잃었다. 0.01초,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는 그 찰나가 두 선수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 0.01초, 찰나라는 시간이 태산의 무게로 느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가끔은 필자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가끔 0.1초보다 수만 배 긴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공으로 날리고도 태연해하며 산다. 0.01초, 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4년이란 긴 세월 악전고투하였을 선수들이 흘린 땀의 무게를 생각해 보라, 먼지가 모여 태산이 되고 찰나가 모여 세월이 됨을 잊고 산다. 세상의 범부들은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단번에 무엇을 해결 하거나 성취하고자 한다. 그렇게들 평생을 살고 있으니 이렇다 할 이룸도 없다.

이제 와서 검불처럼 날려버린 젊음을 아쉬워한들 과녁을 향해 이미 날아가 버린 화살촉이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승부는 많다. 그중에 가장 어려운 승부는 자기와의 싸움이다. 극기하는 자가 진정한 영웅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빛나는 것은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 찰나를 아껴 온갖 시련과 역경을 넘은 자기극복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큰 스님께서 열반에 들면서 “이번 생은 망했다”고 일갈(一喝)했다. 치열하게 빈틈없는 수행으로 일생을 보낸 큰 스님도 이렇게 탄식하는데 시간의 화살을 허공에 그냥 날려버린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망할 삶 같은 것도 애초에 없다. 0.1초의 위대함이며, 0.1초 그것이 바로 영원임을 깨우쳐야 하리라.

반면 찰나보다 무한히 긴 시간은 겁이다. 어떤 비구가 붓다에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1겁의 길이는 얼마나 됩니까? 붓다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비구여, 쇠로 된 성이 있는데,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유순(由旬, 약 8킬로미터)이다. 그 성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워놓고, 어떤 사람이 그 씨를 100년에 한 알씩 집어내어 그 씨가 다 없어져도 1겁은 끝나지 않는다. 비구야, 겁이란 이와같이 길고 길다.” <雜阿含經 제34권, 제9경>

“비구여, 깨어지지도 않고 허물어지지도 않는 큰 돌산이 있는데,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유순이다. 어떤 사내가 가시국(迦尸國)에서 나는 솜털로 100년에 한 번씩 쓸어 그 돌산이 닳아 다 없어져도 1겁은 끝나지 않는다. 비구야, 이와같이 길고 긴 게 겁이다.” <雜阿含經 제34권, 제10경>

겁(劫)은 kalpa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고, 대시(大時)·장시(長時)라고 번역한다. 세계가 성립되는 지극히 긴 기간을 성겁(成劫)이라 하고, 세계가 성립되어 머무는 지극히 긴 기간을 주겁(住劫), 세계가 파괴되어가는 지극히 긴 기간을 괴겁(壞劫), 세계가 파괴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지속되는 지극히 긴 기간을 공겁(空劫)이라 한다.

인간의 수명이 8만 세에서 100년에 한 살씩 줄어 10세에 이르는 기간을 1소겁(小劫)이라 하고, 인간의 수명이 8만 세에서 100년에 한 살씩 줄어 10세에 이르고 다시 10세에서 100년에 한 살씩 늘어 8만 세에 이르는 긴 기간을 1중겁(中劫)이라 하는데, 성겁, 주겁, 괴겁, 공겁은 각각 20중겁이다. 네 겁을 1대겁(大劫)이라 하므로 1대겁은 80중겁이 된다. 과거의 1대겁을 장엄겁(莊嚴劫)이라 하고, 현재의 1대겁을 현겁(賢劫), 미래의 1대겁을 성수겁(星宿劫)이라 하는데, 현겁은 이 기간에 수많은 현인(賢人)들이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고 하여 이와같이 일컫는다.

어느 젊디젊은 사형수가 있었다. 노심초사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현장에 도착한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28년을 살아온 그 사형수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최후의 5분은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인생 최후의 시간이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그 사형수는 고민 끝에 결정을 한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작별기도를 하는데 2분, 형을 받은 이후 늘 함께하고 곁에 있었던 사형수들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나누는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 최후의 순간까지 서 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가족들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려는 순간 벌써 2분이 지나 버렸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돌이켜 보려는 순간 ‘아, 이제 3분 후면 내 인생도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나가버린 28년이란 세월을 금쪽처럼 아껴쓰지 못한 것이 정말 뼈저리게 후회가 되었다. ‘다시 한번 인생을 더 살 수 있다면’ 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 기적적으로 사형집행 중지 명령이 내려와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고 한다.

구사일생(九死一生),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풀려난 그는 그후 사형집행 직전의 그 5분의 절박했던 시간을 생각하며 평생 시간의 소중함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 순간처럼 소중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그러한 결과 그는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영원한 만남> 등 수 많은 불후의 명작을 발표하여 톨스토이에 비견되는 세계적인 대문호로 성장하였다.

그 사형수가 바로 도스트예프스키이다. 그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 소설가이고 비평가이며 사상가였다. ‘넋의 리얼리즘’ 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사회적으로 복잡화된 인간의 내면 심리를 그려냈고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들어서는 과도기 러시아의 시대적 모순을 작품에 투영하였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혁명가들과의 교류는 그의 생애를 통해 그의 창작활동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되었으며 내란음모 사건에 연좌되어 다른 서클 회원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징역형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로 유형되어 시베리아의 옴스크 감옥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은, 그가 인도주의자, 공상적 혁명가에서 변모하여 슬라브적인 신비주의자, 인종사상(忍從思想)의 제창자로 사상적 전신(轉身)을 하게 된 계기였다.

우리네 인생은 수많은 시간 속에 살아간다. 어떨 때는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이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다. 언제인가는 누구나에게 공평하게 인생의 시계는 멈출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해가 바뀐 지가 엊그제 같더니 벌써 꽤 여러 날이 지났다. 새해 결심했던 일들이 모두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차근차근 진행이 되었는지, 아니면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었는지, 누구나 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아끼며 소중하게 헛되지 않게 마지막 5분처럼 산다면 먼 훗날 후회 없는 인생이 될 것이다.

또 다른 예화(例話)를 한 가지 더 든다면, 서양 연극 중에 생명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한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지 15분’이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은 유년기 때부터 총명했다. 뛰어난 성적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심사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이제는 학위를 받을 날짜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의 앞날은 장밋빛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검진 결과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떨어졌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남은 시간은 단지 15분. 그는 망연자실했으며 도무지 이토록 불행한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5분이 지나갔다. 이제는 남은 인생의 시간은 단지 10분이었다. 이때 그가 누워 있는 병실에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억만장자였던 당신의 삼촌이 방금 운명하셨습니다. 그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니 속히 상속 절차를 밟아 주십시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그에게 억만금의 재산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운명의 시간은 또다시 줄어들었다. 그때 또 하나의 전보가 도착했다. “당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올해의 최우수 논문상을 받게 된 것을 알려드리며 축하합니다.” 이 축하 전보 또한 시한부 인생인 그에게는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절망에 빠진 그에게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왔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온 결혼 승낙이었다. 하지만 그 전보도 그의 시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15분이 다 지나고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렇게도 살아생전 귀하고 소중한 것들, 억만장자의 재산도 최우수 박사학위 논문상도 사랑하는 연인의 청혼승낙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으니 너무도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 연극은 한 인간의 인생을 1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응축한 것을 보여준 것이자 청년의 삶은 바로 우리네 평범한 모두의 삶이라는 의미가 있다. 젊은 시절 누구나 꿈을 좇아 정신없이 내달리다 보면 어느새 머리카락이 희끗해지고 어느덧 중장년의 나이에 이르렀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즈음이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때 가서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렇게 깨달은 순간 뼈저리게 안타까울 뿐이다. 시간은 강물과 같아서 막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흐르는 물과 같은 세월을 어떻게 흘려보내느냐에 따라 시간의 부피와 질량도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을 한다. 나이를 더해 갈수록 정말 시간의 빠름을 절박하게 느끼며 참으로 두렵기까지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멈춤 없이 쉼 없이 흘러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은 매사에 멈추는 법도 또 더디게 흘러가는 법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시간을 저축하거나 남에게서 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 그렇다고 시간이 우리에게 무한정 베풀어지는 것도 아니다. 길어야 고작 100년 남짓 삶을 영위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저 숨쉬며 속절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네 삶에 있어서 곧 생명이라 할 수도 있다. 귀하고 귀한 현재의 시간에서 헛되이 흘려버릴 수도 없는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고 많은 이들은 죽을 때 후회를 한다.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한다. 남은 시간 동안 결코 후회 없는 삶을 위해 많이 베풀고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만이 남은 시간을 보람있게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란 그저 주어진 시간에 자신의 배역을 하고 퇴장해야 하며 재공연이 없는 단막극일 뿐 이다. 누구나 청춘인 시절에는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잊고 산다. 유년기에는 속히 성장하여 어른이 되길 갈망한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는 꿈 많았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우정이니, 영원한 사람이니 하며 영원이 뜻이 뭔지도 모르면서 영원이란 말을 남발한다.

인류사에서 어느 누가 영원이란 시간을 살아나 보았을까? 기를 쓰고 살아도 100년도 채 살기 힘든 중생에게 영원이란 말이 과연 타당하기나 할까? 유용하지도 않는 일에 세월의 화살촉을 다 날려버리고서 이제 몇 개 안 남은 화살촉을 아끼려 한다. 어리석은 중생이 하는 짓거리이다. 너무나 길고 긴 시간, 무한의 시간 속에서 중생은 하루살이의 삶을 산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하루살이도 못 된다. 찰나의 세월을 살고 가는 중생일 뿐이다.

붓다의 겁(怯)에 대한 비유의 말씀은 찰나 같은 삶, 일순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참되게 살라는 가르침의 말씀이다. 짧고 짧은 삶에 시기하고 질투하고 비난하며 미워할 시간이 어디에 있다고 사랑만 하다 죽어도 아쉬운 법인데 허구헌날 분탕질에 난투극이다. 인생 마지막 가는 길에 입는 수의(壽衣)는 주머니도 없다. 달랑 영정(影幀)사진 하나 앞세우고 떠나야 하는 그 길이 인생의 종착지이다. 헛된 욕심 다 내려놓고 사랑하면서, 나누면서 베풀면서 그렇게 살라는 가르침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여!
지금 이 순간 힘차게 새로운 한 해의 출발을 도약하자.
I will do everything I can do.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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