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뿌림과 거둠의 소중한 의미
[기고] 뿌림과 거둠의 소중한 의미
중촌교회 장건영 권사
  • 이승주 기자
  • 승인 2020.02.12 14: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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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영 권사
장건영 권사

 이 시간 우리 모두가 구하는 수고가 어디쯤에 있는가를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믿음의 지경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달란트를 말하지만, 달란트의 확장성과 보관성, 그리고 보장성은 나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뿌리고 거두라고 주신 달란트는 경제성보다는 영혼의 지경을 넓혀가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과정에 대한 수고의 대가를 논하는 것은 합당한 지경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앞에서 나는 지킬 것, 행할 것, 누구보다 앞서 할 만큼 다했다는 바리새인의 항변과 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저는 할 말이 별로 없어요) 라고 탄식하는 세리의 속사정에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겠다)는 선포 앞에서 (이럴 수가?)하며 분을 내었던 바리새인과 우리 서로는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가 어떤 부분으로 합당함을 논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겠지만 외적 경건에서 내적 반추로 삶(인격)을 다스려 나가려면 자신의 속사정을 인식하는 비율을 줄여나가는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각각의 인식이 다른데 여기에 (왜 저럴까? 왜 그럴까?)를 들이대면 절대성보다는 상대성이 앞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로(방향)와 경로(거리)를 향한 투자라는 함수에는 불확실성과 오류가 결정(선택)의 앞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에도 견디고 이겨낸 자만이 (수고했다 충성된 종아) 라는 메이저 리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고 언저리에서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것만으로는 시합에 출전하는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므로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뜻에 얽매어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 대해서도 모르모토(실험용 쥐)로 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닌 것을 가지고 섣부른 실험을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많은 것을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실험하려 합니다. 그러나 선택의 부분은 실험을 통해 당장의 수치로 나타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상당합니다. 

예를 든다면 믿음의 경로, 교육의 경로, 경제의 경로가 이에 해당합니다. 접한 자의 주관과 정책의 방향이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그 결과가 나타나지만 이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중에 하는 말로 (그땐 그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가 전부입니다. 

나는 방향만 제시했을 뿐 선택은 당신들이 했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를 어느 학자는 과학이 추구하는 자연실험의 한줄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연실험은 어느 우연한 경우에 어느 우연한 것으로 검증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부분에서 믿음의 지체들은 선택이라는 줄서기에서 열외를 시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경로는 이미 검증이 되어있는 부분이므로 섣부른 실험을 하지 말고 성령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물론 어찌 보면 뿌리는 것도 선택이고 거두는 것도 선택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온 과정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니 피조체들의 삶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넘나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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