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 26년만의 해후
[제언] 26년만의 해후
  • 충남일보
  • 승인 2008.07.0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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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생활 벌써 27년째다.
제자의 자녀들이 몇 년 전부터 본교에 입학하기 시작했다.
학부형이 된 제자들을 보는 것은 새로운 입학생들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그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자신이 다녔던 모교에 자녀들을 보내는 것은 그들의 모교사랑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어 마음 뿌듯하다.
어제는 다리에 깁스를 한 제자의 아들을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담임이 수업 때문에 시간을 내지 못하자 내게 부탁을 해온 때문이다.
목발을 이용해야 하기에 아이가 다 나을 때까지는 제자가 아들을 학교에 데려오고 집으로 데려가는 일을 한 동안 반복해야 했다.
얼마 전 인사를 나누면서 제자는 지금이 한창 바쁜 농사철이라면서 학교시간에 맞추기가 조금 어려울 때가 있다고 했는데 어제는 무척 바쁜 일이 있었나 보다.
사정이 생겨 학교에 올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침 시간이 비어있어 아이를 태워 집으로 가게된 것이다.
아이를 태우고 가면서 마음은 26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제자가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아 바닷가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집을 찾아 갔었을 때 아버지만이 계셨었는데 당시 정확한 나이는 몰랐지만 족히 40은 넘으셨던 것으로 기억이 났다.
그렇다면 지금쯤 7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셨을 텐데 이제 그 옛날의 학부형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는 것이다.
뒤에 앉아있던 제자의 아들이 지름길로 안내한다고 가는 길은 바다를 메운 끝이 보이지 않는 논뿐이었다. 그 사이로 난 시멘트 농로 길을 따라 뒤에서 좌회전이요, 우회전이요 하면 나는 그 녀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차례 동작을 반복했다. 30여분 만에 학생의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자 녀석이 “선생님! 들어가셔서 커피한잔 하세요. 제가 끓여 드릴께요”한다. 녀석의 말대로 집에 들어가니 목발을 한 채 주전자에 물을 채워 가스 불에 올린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디 계시는지 물었더니 부엌창문을 통해 보이는 넓은 밭에서 일하시는 두 분을 손으로 가리킨다. 녀석이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부르니 마침 밭 일이 끝나셨는지 집을 향해 걸어오시는데 집안에 그대로 앉아만 있을 수 없어 바깥으로 나가 인사를 올렸다.
집안 같았으면 넙죽 큰절을 드렸을 텐데 바깥마당이라 그냥 부형님의 손을 꼭 잡았다.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26년 전 제가 아드님 문제로 아버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지요. 제가 그때 그 담임교사입니다. 세월이 이리도 빨리 흘렀네요.”, “선생님께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도 눈물이 횡하니 고여 오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아들은 비록 졸업시키지 못했으나 손자는 틀림없이 졸업시키겠노라고 한 제자와의 약속을 알고 계신 학부형님은 너무도 감사해 했다.
마음속에 제자를 졸업 못시킨 담임으로서의 회한과 미안한 마음이 학부형님을 만나면서 어느 정도 용서를 받은 것 같아 돌아오는 길은 더없이 가벼웠다.


/ 당진송악고 교사 이 호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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