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흥동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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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대흥동으로 (59) 라이따이한의 아픔
  • 김우영 작가
  • 승인 2007.05.21 20: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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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온 ‘탁드엉’은 같은 라이따이한인 ‘러비홍’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힘들게 살고 있었다. 가난한 한국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힘든 생활을 하기에 이국에서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그류와 오세진 작가는 오늘은 신당동의 탁드엉을 집을 먼저 찾기로 했다. 탁드엉의 집을 갔을 때 탁드엉의 부인 러비홍은 가만히 누워있는 아들과 함께 맞아주었다.
아들은 그녀가 한국에와서 탁드엉과 함께 살면서 그 사이에서 낳았으며, 현재 근력무기력증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지체장애아동이다.
탁드엉의 부인 러비홍이 태어난 곳은 베트남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71년 호치민이란다. 부인 러비홍은 당시 베트남의 수 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낳은 이름없는 아버지 한국 군인이 1975년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떠나버렸다. 러비홍도 그랬듯이 대부분의 라이따이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가슴 아픈 라이따이한이다.
베트남에서 러비홍은 한국인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라이따이한으로 어려운 질곡의 삶을 살아야 했다.
“미국이 철수하면서 2세는 물론 2세를 부양하던 양부모까지 모두 미국으로 데려간 것과 비교하면 따이한은 이럴수 없어요. 대한민국은 참으로 어이없는 나라였어요. ”
러비홍은 탁드엉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울면서 그류와 오세진 작가한테 고백하고 있었다.
한국은 자기 국민들이 남의 나라에서 뿌려놓은 2세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는 커녕 그런 사실조차 인정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나라로부터 버림받고 베트남으로부터 냉대받는 어이없는 생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던 지난 1999년 어느날 러비홍은 호치민의 변호사에게 비용을 주고 베트남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다가 러비홍은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찾았으나 한국인 아버지는 끝내 그런 일이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버지 호치민의 저희 어머니를 모르세요. 제가 그 딸 러비홍이예요. 흐흐흑---”
“난 베트남에 근무는 했지만 모르는 일이요?”
“아버지 너무해요. 흐흐흑---흐흐흑---”
러비홍은 탁드엉과 마찬가지로 한국인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친자소송을하여 아버지가 확인이 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오늘날의 남편인 탁드엉을 만났다. 소송을 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서야 비로소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국적을 얻어 한국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러비홍은 동네의 교회를 다니며 이런저런 모양의 도움을 받고 있다. 동네 부근의 어느 봉제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요즘은 일감이 없어 하릴없이 놀고만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사정은 신당동 일대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다른 라이따이한들도 비슷한 실정이란다.
“앞으로 살길이 막막해요?”
그류와 오세진 작가는 난감해했다.
“이를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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