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끝내 아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최기복의 孝칼럼] 끝내 아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3.12.19 19: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들이 있나요? “네”
집이 있나요? “네”
어디 아픈가요? “네”
이름은? 나이는?
“그 이상 아무 것도 묻지 마세요”
경찰은 그녀를 복지시설에 보냈다. 그녀는 사흘 만에 숨을 거두었다.
지난달 12일 충남 서천의 한 복지시설에서 죽은 60대 여자의 이야기를 스크랩해서 구성한 이야기다.
발견 당시 그녀의 얼굴은 주먹으로 맞은 것 같이 멍이 들어 있었다. 부위마다 색이 달랐다. 그녀는 말기 신부전증환자였고 정신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에겐 조울증 환자인 39세의 외아들이 있었다.
외아들은 환자인 어머니를 간호하다 지쳤다. 아들은 어머니를 승용차에 태워 예산에서 수 십 km 떨어진 충남 서천의 파출소 부근에 버렸다.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자기를 버린 유일한 혈육인 아들의 이름을 되새기며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이름을 묻는 경찰관의 추궁에 끝내 말하지 않았던 아들의 이름이다.
치료를 받지 못하여 수명을 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참한 운명보다 자식의 얼굴을 마지막으로라도 보지 못하는 한을 안고 숨을 거둔 것이다.
경찰이 그녀의 신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들 김씨를 찾아냈다. 그도 조울증 환자였다. 신부전증 환자인 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힘들었다고 했다. 병시 중에 지친 아들의 선택이 살아 있는 어머니의 유기였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CCTV에는 김씨가 어머니의 뒷목 부분을 타격하는 장면이 녹화되어 있었다고 했다.
차상위 모자의 생활상 속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정부는 복지라는 이름하에 눈에 보이는 것만을 선택하여 그 대책을 강구하고 국민을 상대로 하여 정책적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의 롤모델은 우리와 거리가 먼 것인지? 천문학적 예산을 세워서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유복한 노인들에게까지 그 시혜를 베풀다가 김씨와 죽은 그의 어머니 같은 사연들을 속출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과거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는 자본주의 사회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최소한의 생계 부문은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존중의 기본적 시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가난은 이 땅의 효심까지도 멍들게 한다. 천륜이라는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가난 때문에 무너져 내려서는 안 된다. 가난한 시절일수록 가족 간의 사랑은 더 돈독해 있었지만 자식의 이름에 불효자 이거나 패륜아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 두려워 자신을 유기한 아들의 이름을 밝히기를 끝내 거부한 어머니의 마음이 가슴을 시리게 한다.
모자간의 천륜이 가난과 질병 앞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어머니는 끝내 아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