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대흥동 연가 제3장 방황
[연재] 대흥동 연가 제3장 방황
(34) 마음의 달이 오직 둥글어
  • 김우영 작가
  • 승인 2007.04.15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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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만에 힘 쓴 탓인지 다리가 후둘 거린다.
벌써 주위에는 까아만 사위로 물들어 가고 저만치 농부들이 들녘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지 경운기를 몰고 탈-탈-탈- 허기진 소리를 내며 둑길을 타고 오고 있었다.
오래 되었음직한 느티나무를 뒤로 하고 그 집 앞을 내려왔다. 힐끗 고개를 들어 혹시나 하고 집 앞 대문가를 바라보니 아까 외양간에서 운우지정을 가졌던 여인네가 앞치마에 손을 묻고 흰 손수건을 어둠에 흘리듯 살포시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까아만 어둠에 가려 흰 손수건을 흔드는 여인네의 어렴풋한 모습만이 그냥 까맣게 어둠과 함께 칸델라의 불빛처럼 추억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허허 고년 꽤 쓸만하군 그래 가만, 가아만 아무래도 누구를 닮았음직한 고년이 아무래도 프랑스로간 그니의 몸과 흡사하게 닮았군 그래”
계란형으로 고옵게 빠진 턱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그리고 풍만한 유방 주위로 보송보송하게 난 털, 좀 뚱뚱한 허리선은 틀리지만 건장한 사내 두 서 넛은 한순간에 해치울 듯 한 음욕스런 둔부, 그리고 윤기 있는 깊은 숲에 휩쌓여 모양새마져 그 안에 감추어진 지리산 계곡산천의 옹달샘 같은 음부, 또 흐느끼는지 웃는지 지속적으로 용솟음치며 표호하는 여우 짓의 음흉스런 소리의 율동적 음욕의 뜨거운 몸 덩어리… 이러던 것이 그 여인 그니가 아니던가.
아! 그니와 흡사했던 저 여인이 끝내 속세에서의 단 한 번에 인연을 못 떨치고 저리도 대문가에서 어둠을 흘리며 손수건을 흔드는 저 여인은…
그류는 까아만 어둠을 쫓아 터벅터벅 걸었다.
뒤에 걸머진 행장이 힘겨운 듯 어깨 아래로 흘러져 내려온다.
세속과 번민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과 인간사의 일들로 얼룩진 일들이 수없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무(無)에서 무(無)가 있을 뿐이고 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인데 왜 이리 심난한가.
아직 인생의 이치를 못 깨달았단 말인가.
어느 현자가 말하기를 현실을 요리하려면 현실 안에 파고들어 현실에 굴종하는 절차를 밟으라 했지 않았던가.
한순간의 육(肉)적인 인연을 그리워하고 애닳아 하는 일은 그만큼 이 사람이 아직 멀었다는 일 일진데… 불현 듯 삶 그 자체가 화두가 되었던 경허(鏡虛) 스님의 선시(禪詩) 한 구절이 생각났다.
마음의 달이 오직 둥글어 / 그 빛이 일체만상을 삼키네 / 빛도 없고, 빛의 대상도 없으니 / 다시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 그래, 모든 것은 마음의 작용인데 마음 자체 또한 없으니 일체는 무(無)이다. 무(無)는 다시 무로 돌아가므로써 허무를 뛰어 넘은 것 일게야, 아암 그렇 말구!”
그류는 한참을 고개를 끄덕이며 걷다가 어디 잘만한데 없을까 하고 까아만 어둠과 흰 눈으로 덕지덕지 깔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주 유구 어디 못 미쳐 어디 같은데 이 몸 하나 의지 할 곳이 없단 말인가 하늘이 지붕이요, 땅이 이불 같은 이 창해의 우주를 말이야......”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저만치 산허리 아래께로 까아만 어둠을 뚫고 새하얀 불빛이 찬바람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꼬불꼬불한 둑길을 따라 산 아래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곳을 향해 가는 그류는 마치 무엇에라도 홀린 듯 내처 끌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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