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종이호랑이’
[데스크 칼럼]‘종이호랑이’
  • 한내국 정치부장
  • 승인 2010.06.1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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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어람(太平御覽)에는 마치 이솝 우화(寓話)와도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주(周)나라 때 어떤 사나이가 천금(千金)의 가치가 있는 따뜻한 가죽 이불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는 여우 가죽으로 이불을 만들면 가볍고 따뜻하다는 말을 듣고 곧장 들판으로 나가 여우들과 이 가죽 문제를 상의하였다(與狐謀其皮).
자신들의 가죽을 빌려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여우들은 깜짝 놀라서 모두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얼마 후 그는 맛좋은 제물(祭物)을 만들어 귀신의 보살핌을 받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에 그는 곧 양들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하며 그들에게 고기를 요구하였다.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양들은 모두 숲속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다. 호랑이에게 가죽을 요구하다라는 뜻으로 여호모피(與虎謀皮)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는 여우나 호랑이에게 가죽을 벗어 내라하고 양에게 고기를 썰어 내라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 즉,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비유한 말로 널리 사용되는 말이다.
지금 우리 지방자치시대의 현주소를 정치권과 견주어 빚대는 말로 이 말이 회자되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단체장은 곧 ‘소통령’이며 이를 견제하는 지방의원은 곧 ‘종이호랑이’라면 딱히 우리 지방자치가 어떠할까를 한 눈에 알수 있을 터이다. 일간 매체들로부터 발의실적 최하위라는 제하로 몰매를 맞는 충남도의회를 가리켜 이런 말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충남도의회는 의회가 밝힌 것처럼 전국에서 5번째의 의원발의를 하는 등 나름 노력하는 의회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지방의회중에는 상태가 훨씬 심각하다.경실연이 제4대 광역의회 의원들이 발의한 조례안 건수(2006년 7월~2010년 1월)를 조사한 결과 의원 1인당 평균 발의 건수는 2.07건에 불과했다.
경북도와 부산시 의회는 1인당 발의 건수가 1건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서울시의회 의원 14명은 조례안을 1건도 발의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발의된 조례안의 절반 이상은 의회 사무 관련이거나 상위 법령에 따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제정하는 것으로 실제 시민 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뿐만 아니다. 감독 기능도 부실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11월 강원도의회는 1조5천억원 규모의 알펜시아 리조트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던 강원도개발공사에 대한 행정사무감사를 벌였다.
이 사업은 당시 상당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었지만, 의원들은 “정상영업을 개시하면 만기 도래하는 공사채를 감당할 수 있다”는 개발공사의 ‘부실한’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정부가 개발공사에 자산 매각과 구조조정을 주문하자 “도가 100% 출자한 공사가 추진하는 사업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한 사람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며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지방의회는 문제가 될만한 사안에 대해서는 조사권을 발동할 수 있지만, 실제 조사에 나서는 일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현행 제도가 지방의회와 지방의원들의 무력감에 목을 쥐고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방의회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게 된 것은 지방선거 후보자에 대한 정당공천제에서 비롯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005년 정당공천제가 도입되면서 영남과 호남 등 많은 지역에서 한 정당이 단체장과 지방의회를 모두 장악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는 ‘한솥밥’을 먹는 처지에 의회가 집행부를 감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4대 지방의회의 조례안 가결률을 살펴보면 ‘1당 체제’인 울산·부산·광주시의회는 단체장이 제출한 조례안의 90%가량을 원안 그대로 가결했다. 다양한 정당이 분포하는 제주시의회의 원안 가결률이 36%인 것을 감안하면 다른 의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조례안을 처리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사례는 집행권을 가진 도지사와 절대 다수를 장악한 충남도의회와 대전시의회에서도 적지않은 문제를 노출시켰을 것이다.
게다가 지역구 국회의원이 공천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지방의회가 지역구 국회의원의 사유물이 되고 참신한 정치 엘리트들의 진출이 봉쇄되는 현상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번 5대 지방선거도 그런 이유들로 몸살을 앓았다.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때문에 심지어는 선거가 방해돼 낙선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으며 공천과정에서 이같은 횡포에 불복,중앙공심위에 항의하다 괘심죄에 멍에를 짊어진 지망생도 적지 않았다. 정당공천을 하는 영국과 독일은 당원이 공천권을 행사해 잡음이 없고 미국은 정당공천의 부작용을 우려해 지방정부 70%가 선거 시 정당표시를 금하고 있다.
우리처럼 정당공천을 국회의원이 지역정치 장악의 도구로 쓴다면 아예 폐지하는 게 옳다.
유권자는 곧 지방살림을 이들 지방의회에 위임한 것이다. 하지만 퇴색된 그늘에서 고추를 말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의회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돼야 한다.
연봉 수천만원을 들여 의언들의 업무를 지원하면서 결국 이들을 종이호랑이로 옥죄는 것도 모두 제도 탓이다. 그런 제도 뒤에는 이를 방조하는 눈면 정치인들의 사욕이 가득차 있다.
낡은 정치구조를 바꾸려면 의원들이 제대로 일할 바탕을 누군가가 만들어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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