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규석 박사 ‘앙코르 문명의 이해’100회 연재를 끝내며…
서규석 박사 ‘앙코르 문명의 이해’100회 연재를 끝내며…
“동남아시아 역사인 흰두문명 이해가 필요 할 때”
  • 한내국, 차종일 기자
  • 승인 2007.02.21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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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석 씨는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서 사회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자치경영개발원에 재직하면서 대학에서 문명사를 강의하고 있다.
- 어떤 계기로 앙코르 문명을 연구하게 되었는지
▲제가 국회 정책연구위원으로 재직하던 1997년에 베트남공산당을 친선 방문했을 때 이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살았던 참파족의 박물관을 둘러보고 힌두문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죠.
우리가 아는 베트남은 자유진영의 월남과 공산화된 북베트남, 그리고 통일된 사회주의 국가가 일반적인 인식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도 불교사회주의 국가, 킬링필드로만 막연하게 인식되고 힌두문명의 꽃인 앙코르 와트가 세워진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됐습니다.
저가 경험했던 것처럼 한국인은 대체로 그리스 로마신화로부터 파생되는 헬레니즘 문화에 너무 경사되어 있던 탓에 가까운 이웃나라인 동남아시아의 고대사에 대해서는 이해가 거의 없는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몇 번 방문하면서 또 다른 문명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 그것도 뛰어난 문화를 꽃피웠다는 사실을 알고동남아시아 고대문명사를 정립한 프랑스 극동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부끄러운 수준의 저서이지만 ‘신화가 만든 문명 앙코르 와트’를 2003년에 발간하게 됐는데 이 때 마침 한국인의 외국 여행이 급증하고 캄보디아의 정치상황도 안정되자 이곳에 대한 관심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역사의 여명기부터 15세기에 이르기까지 힌두문명을 받아들인 동남아시아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됐습니다.

- 서구문명과 달리 인도를 발원지로 하는 힌두문명은 저급하거나 이해가 어렵다는 인식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인도에서는 사람보다 신과 사원의 수가 더 많다고 혹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수한 종파와 사원으로 뒤덮여 있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화라는 폄하이기도 합니다. 비교문학자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친숙한 우리 서양과 낯선 동양의 그들’이란 이분법적 사고에 은연중에 동화되어 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서양=문명, 동양=미개라는 일종의 문화적 편견 같은 것 말입니다.
유럽인의 사고 그대로 동양을 보았기 때문에 유럽중심주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동양을 유럽인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동양사회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관점에서 타자를 이해하려고 접근할 때만 비로소 명확하게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국을 통해서 한자와 문물을 받아들여 역사의 여명기를 개척한 것처럼, 동남아시아는 역사 이래 힌두문명을 받아들여 나라를 세우고 문자를 갖추고 사회조직과 생활규범을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 수용했습니다.
힌두적인 왕권 개념, 불교와 힌두교의 의례, 의사소통 수단인 산스크리트어, 사회조직원리인 다르마샤스트라, 고담신화이자 문학의 꽃인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라는 다섯 가지 요소의 현미경을 통해서 고대의 동남아시아를 이해한다면 그렇게 난해한 문명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중국을 통해서 인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나 것처럼 인도와 한국의 고대문화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요소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힌두문명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20대 중반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닐 때 미국의 인류학자인 클리포드 기어츠가 쓴 ‘문화의 이해’에서 힌두문화권의 왕도(nagara)를 읽었습니다만 그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나이 40대가 되서였습니다.
동남아시아를 방문하고 인류학과 역사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을 공통으로 연구하면서 힌두문명에서 왕도가 갖는 본질을 알기까지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일 뿐입니다.
중국의 전통무술인 우슈,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이솝우화도 알고 보면 인도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이솝우화는 본래 부처님이 여러 경전을 통해서 말씀하신 내용들입니다.
그것이 여러 세기에 걸쳐 아랍과 서양으로 건너가 각색된 것이나 ‘본생경’이나 ‘방광대장엄경’에 기원한다는 사실을 모를 뿐이죠. 앞으로 이 분야에서의 학자들의 노력이 더 필요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동남아시아 문명은 복잡 다양하고 외견상 독자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종의 가족적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유사성은 앞서 힌두화의 다섯 가지가 침전된 문화적 특질들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동방에서 또 다른 힌두문명, 인도를 조명하는 것도 문명연구의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 앙코르 문명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고대사회에 대한 연구가 잘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데 앞으로의 어떤 연구를 계획하고 있는지
▲역사가 시작되고 서양세력이 동남아시아를 정복한 식민시대까지 이 지역에서 역사기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풍부하지 않습니다.
입으로 전해 내려오거나, 야자나무 잎에 기록한 약간의 문헌들, 왕의 비문들, 사원에 기록된 사실들이 전부입니다.
크메르인의 역사기록도 풍부한 편은 아닙니다. 관련 자료가 침묵하고 있어서 역사적인 공백도 많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학자들은 중국의 역사서들, 가령 양서, 수서, 신당서, 원사, 명사, 제번지 같은 2차적인 자료에 등장하는 외교기록을 통해서 침묵하는 역사를 꿰어 맞추는 페즐 게임식 연구가 일반화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프랑스어와 한문해석이 필수적인데 저와 같이 한글세대에게는 연구 상의 장벽으로 다가오고 벅찬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어, 역사, 문화, 사회조직을 연구하는 학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교단에 있는 전문학자는 아니며 직장에서 시간을 쪼개서 틈틈이 공부하는 사람이고 간혹 대학에서 앙코르 문화와 힌두문명을 특강하는 위치입니다.
그러나 2~3년 내에 고대 사회의 동남아시아 문명을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써볼 생각입니다.
이 분야에 국내연구가 일천하지만 기초자료가 축적되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고전기에 인도네시아, 태국, 버마 등지에 세워진 유적 그림도 많이 확보하고 직접 발로 찾아다니면서 살아있는 문명 가이드로서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충남일보의 지면을 통해 앙코르 문명의 이해를 연재하면서 어느 정도의 이론적 윤곽은 서 있는 상황입니다.
그동안 앙코르 문명의 이해를 연재하면서 시간부족으로 미비한 점도 있었지만 독자 여러분께서 관심 있게 보셨는지, 그리고 문명사 이해에 도움이 됐는지 걱정스러운 면도 남아 있습니다.
필자의 짧은 식견은 앞으로 보완해 나갈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린다면 ‘앙코르 문명의 이해’에 이어서 역사 이래 신화와 문학 속에 ‘금지된 영역‘으로 등장하는 여신과 그 영역을 침범하는 ’남성주의‘를 몇 가지 사례를 인용하며 약 60회에 걸쳐 써 보려고 합니다.

▲인류의 엿보기 신화 속에 나타난 여신의 미와 징벌의 아포리즘
이번에 충남일보사가 귀중한 지면을 다시 할애해주신 것을 기회로 삼아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사상이 활발한 나래를 편 고전기 이래 인간의 의식,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신화 속에서 아름다운 여신과 이 여신들의 영역을 교묘하게 침범한 자들이 겪는 속죄를 시와 문학, 그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고대인들은 개인들을 집단 속에 귀속시키기 위해 비유적인 가르침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이 곧 신화라 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여신을 둘러싼 숭배와 존경, 불경죄를 사회구성원들에게 강요하면서 믿고 따르도록 신념체계를 만들어냈으며 시대를 거치면서 그 신념체계를 강화시켜갔습니다. 이번 기회에 소개되는 내용은 고대사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신화 가운데 여신들에 대한 존경과 불경죄, 사회적인 규율을 짚어보는 의도로 기술해나갈 작정입니다.
신화와 작품 속의 여신들을 통해서 한 집단이 개인들에게 가한 행동규율, 사회적 규범을 어겼을 때 초래되는 단죄, 그리고 그 속에서 이뤄지는 도덕적인 갈등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약 60회에 걸쳐 소개될 신화적인 소재는 중세기를 배경으로 한 백작부인 고다이버, 목욕하는 수잔나, 성처녀 아그네스와 막달라 마리아, 군주 부인 그리셀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고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 등장하는 드라우파디 왕비의 수난, 이스라엘의 다윗왕 시대에 있었던 밧세바, 그리고 영국의 근대기에 문학소재로 등장한 백합 같은 엘레인과 샬럿의 아가씨를 대상으로 한 엿보기의 스토리를 소설과 시, 회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엿보기 미학의 오디세이는 투시 카메라와 관음증이 일상을 배회하는 현대의 정보화 사회에서 필자는 폭력으로서의 성과 억압으로서의 성에 반항하는 여신들 그리고 엿보기에 대한 벌로 내려지는 속죄양을 통해서 현대적인 지혜와 경고를 시사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신들의 행동과 비교하며 그들의 행위를 이해한다면 질서와 타락의 경계를 넘나들고 싶어하는 인간의 잠재의식과 긴장감을 확인하고 또 그 위험성까지 인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엿보기 미학과 관련해 필자는 두 가지만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여신의 미는 자연이 선물한 가장 수순수함의 극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신이 설정한 금지된 영역을 넘어 몰래 엿볼 때부터 이미 상황은 에로스의 영역이 됩니다.
고다이버와 아르테미스 신화, 목욕하는 수잔나에서는 시민들이나 그 어느 누구도 스토리 플롯 상 몰래 훔쳐보는 것이 금지돼 있습니다.
그러나 신화는 ‘금지된 영역’을 설정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것을 보도록 남성들에게 덫을 설치했고 그것을 본 자들은 결과적으로 희생자가 되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고다이버의 하얀 다리, 긴 머릿결, 노출된 몸, 그리고 아르테미스 여신과 님프들이 옷을 벗고 목욕하는 장면은 상상가들에게 꿈의 날개를 펼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입니다.
▲금기를 범한 남성들의 단죄.
이 같은 플롯의 설정은 외면적으로는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금지하는 상상력의 제한을 만들어 놓으면서도 독자들을 거기에 탐닉하게 함으로써 대중에 노출되지 않은 기적과도 같은 요소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그녀는 비록 몸을 대중에게 보여주었을 지라도 그것은 일반인, 혹은 보는 자의 의도된 실수로 몰아가는 것이 신화입니다.
고다이버의 경우에도 그녀는 시민들에 동정심을 가진 귀족신분이었고, 독자들은 그녀의 동기가 동정심, 도덕, 연민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육체에 대해서 시선과 관심을 고정시키게 됩니다.
이것은 아르테미스의 목욕장면을 엿보게 된 악타이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처녀신을 의도하지 않게 봄으로써 자신이 기르던 개에 물려죽는 비극이 잉태됩니다.
매춘굴에 보내진 성처녀 아그네스의 경우에도 긴 머리가 경이적으로 자라 머릿결로 옷을 만들어 몸을 가릴 수 있었고 목욕하는 수잔나를 몰래 훔쳐본 두 장로들도 알몸을 본 자에 대한 죄를 내려 받는데 그것이 곧 신화속에 등장하는 여신들의 품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극적 요소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누드의 한계와 예술이란 옷을 입혀 감상할 수 있는 한계의 접합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르테미스와 고다이버, 아그네스, 수잔나는 공적인 연출영역이며 이를 엿본 사람들은 사적 영역입니다.
엿보기는 능동적인 반면 몸을 내보이는 대상은 성적으로 확고한 평판을 얻고 있지만 수동적인 위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엿보기를 하는 남성들이 죄와 연관돼 있습니다.
이들 남성들이 스코퍼필리아(scopophilia)라면 여인들은 엑서비져니즘(exhibitionism)과 연관되어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프로이드가 말한 나체를 보고 즐기는 스코퍼필리아와 남의 눈에 띄기를 좋아하는 일종의 노출증 즉 엑서비져니즘이 여신의 신화 속에 내재돼 있는데 다음 회부터는 두 요소를 신화와 그림과 시를 통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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