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실종된 효심
[최기복의 孝칼럼] 실종된 효심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3.06.06 19: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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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침 TV 뉴스에 노인이 나타났다. 칠순이 지난 노인이었다. 직영하는 편의점에 중학생이 나타나 담배를 달라고 하자 어린 학생에게는 담배를 팔 수 없다고 했다. 불문곡직 주먹이 날아 왔다. 그것도 한 대를 때리고 도망치듯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10대를 맞았고 손님이 와서야 주먹질이 멈췄다고 한다. 귀밑머리에 핏 자국이 보였다.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리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 한들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야 하나. 어떻게 이런 행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에 민족 신앙처럼 면면하게 이어온 효(孝)는 실종된 것인가? 정부 여당의 고위 공직자나 책임질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학교 교육의 선도적 위치에 있는 각급 교사들이나 해당 교육부장관에게는 ‘어떻게 이런 사태를 막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고 싶다. 원인을 알면 답은 자동으로 나온다.
그 첫째 원인은 부모 탓이다. 자식 교육의 현 주소는 오로지 남보다 잘 먹이고 입히고 불편 없이 살게 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과거 대가족 제도 하에서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행하는 일체의 행위를 본받다 보면 효는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가풍이 되었고 정작 효 교육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제도로 가족 제도가 붕괴되면서 효는 전설속의 유산으로 변하게 되었고 핵가족 제도는 형제나 자매가 아닌 남녀 중 하나만 낳아서 기르는 풍토가 안착되면서 ‘효’라는 단어조차 점점 기피하고 금기시 됐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에게 관대할 수밖에 없는 부모는 과보호의 늪 속에서 객관과 주관을 분별할 수 없는 분별능력 없는 자식이 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회초리 없는 학교 교육이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면 졸려도 눈을 비비며 수업 준비에 들어가야 함에도 중학교 교실을 다녀 보면 얼굴을 책상 위에 대고 코를 골며 자는 학생이 상당수다. 이를 깨우려 하자 반장이라는 학생이 난색을 표한다. 그 아이는 그 학교의 싸움 짱이어서 선생님도 그를 깨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혼내려 하자 어느 사이 준비한 휴대폰을 꺼내어 ‘찍어 찍어’를 외친다.
아이들이 담배를 물고 있어도 선생님은 이를 외면하며 지나가고, 지나친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불을 달라고도 한다. 또 여 선생님 치맛단을 올리며 아이스께끼를 외치는 학생들은 부지기수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모른다고 한다.
의무의 준수, 이를 해태하면 처벌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 교육, 그렇게 길러진 학생들 중 머리 좋은 학생은 남보다 빨리 출세하여 10억 짜리 부정한 검사가 될 것이고 제2의 윤창중이 될 것인 즉 더 두려운 것은 이를 속수무책 방관한다는 것이다. 부모는 있으나 부모 교육은 없고, 학교는 있으나 선생님은 없다. 학교는 입시교육의 노역장이니 입시교육과 관계없는 학생은 폭력을 휘두르며 학교를 난장판을 만든다.
담배를 팔 수 없다는 칠순의 할아버지 뺨을 때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무렇게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학생이 나타난 배경이다. 자신이 구타한 학생은 자신의 친 할아버지를 구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 자신들에게 얻어맞은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를 생각할 수 없는 학생들을 양산하는 학교 교육을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가!
노소의 개념이 없고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모르는 자는 폭력의 맛을 알아야 하는데 알리는 방법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효심은 실종되고 효행은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살며 보고 듣는 일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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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봉 2013-06-10 20:24:43
2014년도 부터는 각급학교에서 인성교육<효교육>을 우선하여 실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