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복의 孝칼럼] 구효(舊孝)와 신효(新孝)
[최기복의 孝칼럼] 구효(舊孝)와 신효(新孝)
  • 최기복 충청효교육원장·성산 효대학원 교수
  • 승인 2013.08.08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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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를 말함에 있어 옛날 효와 현재의 효를 구분지어 말하기는 힘들다. 둘 다 효는 효다. 다만 효행에 있어서 시대정신이 접목되어 있느냐의 유무로 옛날의 효와 작금의 효로 분류할 수 밖에 없다.
가령 심청전을 예로 들어 보자. 우리는 어린 시절 심청전을 읽고 심청이의 효심에 목이 멘 기억을 갖고 있다. 인당수에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배에서 뛰어내리는 순간까지 눈먼 아버지를 걱정하던 처절한 장면은 소설적이었든 아니었든 효행의 극치로 밖에 볼 수 없었다. 지금은 그런 딸도 없겠지만 심청이의 효행을 칭송할 만한 효행으로 치부하기에는 석연치 못하다.
만약 소설속의 심봉사가 눈을 떴다고 하자. 자식 목숨 팔아 두 눈을 뜨고 남은 생을 살면서 딸의 목숨과 바꾼 두 눈에 비치는 것은 무엇일까? 오직 딸의 모습 외에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심청이는 효행을 한 것이 아니라 심봉사에게 해서는 안 될 불효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일한 경우 작금(昨今)의 효행은 어떤 것인가?
심청이가 한쪽 눈을 아버지에게 이식시키고, 한쪽 눈은 본인이 지니고 아버지와 딸이 평생을 함께 사는 일이다. 과거 대가족 제도 하에서 수직적·종속적 가족관계에서의 효는 부모형제와 그에 준하는 가족 간의 관계였다.
가족 간에 주고받는 효행은 거의 일방적이었다. 누구 하나의 일방적 희생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이 시대의 효 정신은 아니다. 수혜자와 공급자의 관계에서 주는 자도 받는 자도 함께 행복한 것이 금시대의 효다.
마비된 인성의 시대 노인은 파렴치, 젊은이는 무개념, 부모자식 관계도 일종의 거래처럼 천륜이 퇴색해 가는 시대를 살면서 효행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함께 공감할 수 있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느냐는 고민의 화두다. 예를 들어 부자아들이 재벌아버지에게 신형 냉장고를 사드리는 것은 효라고 볼 수 없지만 가난한 아들이 고물 냉장고를 아버지 댁에 갖다 넣어 드리고 새 냉장고를 사드릴 수 없어 미안해 하는 것이 효이다.
2000년 전 공자께서는 이것을 이미 설파하셨다. “네 입으로 효를 효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효는 효가 아니다.”
동일한 효행이 주관적으로 효행이지만 객관적으로는 불효나 패륜이 될 수도 있다. 옛날의 효는 조건 없는 희생과 순종이 효였다.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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