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숭동(韓崇東)의 힐링캠프] 계룡산에서 새해의 소원을 빌어보자
[한숭동(韓崇東)의 힐링캠프] 계룡산에서 새해의 소원을 빌어보자
  • 한숭동 前 대덕대 총장·국립한국교통대학교 석좌교수
  • 승인 2013.12.29 18: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계룡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기운찬 산이다. 진안 마이산에서 뻗어 올라온 금남정맥은 대둔산과 향적산을 거쳐 계룡산을 지나 낙화암 부근 조룡대에서 마무리 짓는다. 계룡산은 최고봉의 높이가 845m로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하지만 민족의 명산 또는 영산(靈山)이라 하여 많은 사람이 관심을 두는 산이다.
계룡산 주봉인 천왕봉에서 쌀개봉, 관음봉, 삼불봉 등 봉우리로 이어지는 능선은 등산객들의 단골코스. 아쉽게도 천왕봉은 입산이 금지되어 있다.
계룡산은 신전(神殿)이라 할 만하다. 옛날부터 산악신앙, 불교문화에 덧붙여 풍수지리설, 도참설과 같은 내용이 결부되면서 계룡산만의 독특한 특성과 이미지를 형성했다.
문필봉은 과거나 입시와 관련되어 있고, 쌀개봉은 풍년과 관련 있다. 민간의 소원인 합격, 풍년 소망을 들어주거나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해 주고 수기(修己) 내지는 수양(修養)을 하는 도교의 신명만이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관음봉·향적봉·삼불봉처럼 불교의 신들도 적지않다. 보살도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계룡산 주변엔 명산으로 알려진 이름에 걸맞게 많은 절이 있다. 신들의 꽃밭 혹은 종교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신흥종파의 집결지이며 부지기수의 굿당이 있다. 그리고 사방으로 절이 있다.
동쪽의 동학사와 서쪽의 갑사 그리고 북쪽에 상신리 계룡산 도예촌 부근에 구룡사가 있었으며 남쪽에는 신원사가 있다. 동학사와 갑사는 꽤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는다. 그러나 신원사는 아직 한적한 산사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계룡산은 나에겐 어린 시절부터 인연이 깊다. 상신리에 봉우(鳳友) 권태훈 선생의 처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가의 두터운 친분 때문에 1958년 7세 때부터 선친의 손에 이끌려 매년 두 세차래 그곳을 찾곤 했다. 1950∼60년대만 해도 대전에서 공주행 시외버스를 타고 상신리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큰 냇물을 건너야 상신리로 진입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쪽배를 타고 강처럼 큰 내를 건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봉우 선생은 1983년 5월 8일 성균관대학교 명륜당 야외에서 있었던 우리 부부 혼례식에 주례를 직접 맡아 주시기도 했다. 그 이듬해인 1984년 소설 ‘단’의 출판을 계기로 주인공 권태훈 선생님은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1960년대 후반 서울로 거처를 옮기신 후, 삼각산과 관악산을 오르시며 세상의 변화와 시국을 종종 예언하기도 했다. 봉우 선생은 세계의 중심이 우리 민족으로 옮겨질 것이며, 우리나라는 남북통일을 이룬 후 만주까지 진출한다는 이상적이고 찬란한 미래를 예언했다. 또 책 ‘단’에서는 소련이 해체돼 여러 작은 국가로 변할 것이고 중국 역시 변화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현실이 되자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1985년 만학의 미국유학 길을 무척이나 말리셨으나 나는 그 유학길을 떠났다. 내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기 2년 전, 1994년 운명하셨다. 상신리 옛 처소 안채 왼쪽에 대나무 밭이 크게 있었는데 그곳을 잘 정리하여 묘지를 조성했다. 참으로 소박하고 조그마한 묘지다. 본인의 유지를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봉우 선생께서 평소 자주 해 주시던 말씀은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마라. 거자불추(去者不追), 래자불거(來者不拒)’이다. 맹자의 인생철학이고 불가에서는 ‘래막가거(來莫可拒)’란 말과 같은 뜻이다. 삶의 철학으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새해 일출은 동해만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볼 수 있다. 하루 중 가장 양(陽)의 기운이 셀 때가 일출이다. 갑오년 새벽이 왔음을 알리는 일출과 함께 계룡산에서 신년의 소원을 힘껏 기원해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