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재조명 기획12]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인물재조명 기획12]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흑성산(黑城山)의 명장 김사혁(名將 金斯革)- 고려때 거란군 왜구를 섬멸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6.02.21 1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김사혁 잔적비(앞면)

 


천안의 대표적인 명산인 흑성산(519m)에는 오래전 세종실록지리지와 목천 군현지에 따르면 “상왕산에 못이 하나 있다”고 전하고 있다.
흑성산은 성서산에서 일맥이 서남진해 이룬 산으로 한양의 외성이라 부른다. 성 안에는  둘레 가 739보인 못이 하나있었다.
6·25 직후엔 군사의 요충지로 공군과 미군이 주둔하던 곳으로 현재는 KBS송신소가 자리잡고 있다.
흑성산은 북쪽으로 태조산(太祖山)과 성거산(聖居山)이 있고, 남쪽으로 백운산(白雲山)과 세성산(細城山)이 동쪽으로는 동리 뒤인 중구봉과 소금재가 있다.
유림들은 흑성산을 요순산(堯舜山)이라 칭하였고, 순임금이 정치를 끝내고 거문고를 켰다고 해 아무래도 풍수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으로는 배넘이 산으로 불리우거나 또는 사기를 싫은 배가 지나다 부딪쳐 이가 빠진 모양을 하고 있다 해 취암(鷲巖)이라 불리우는 산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민족의 성지이기도 하지만 남화리 이주민들게는 평생을 한으로 남는 독립기념관이 자리잡고있다.
이렇듯  흑성산은 민족의 정기와 한을 동시에 품은 산이다. 고려때 거란군의 침공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임금이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몽진을 가는 등 혼란한 시기에 홀연히 일어나 적을 섬멸시킨 김사혁의 전적비가 있다.
김사혁은 고려 충숙왕 7년인 서기 1320년 경신 1월 16일에 태어나 우왕 8년인 1382년 임술 12월 24일 64세로 향리 정침에서 졸했다.
묘소는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기와골 계좌에 있고, 표석과 상석이 있다. 오래 세월이 지나면서 신도비가 훼손돼 1979년에 2월에 다시 세웠다.
천안 향토사학자 고(故) 이원표 선생의 주선으로 1994년에 흑성산 정상에 왜구를 물리친 현장에 김사혁 전적비를 세워 그 공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강릉김씨 천안종친회에서 공적비를 세워 후손들에게 선조의 애국충절의 정신을 함양에 힘썼다.
또한, 이 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임금도 버린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김사혁의 전적비를 세웠다.
전적비에는“고려 상원사 시 충절 김공 휘 사혁 전적비(高麗 上元師 諡 忠節 金公 諱 斯革 戰蹟碑)”라고 쓰여져 있다.
전적비에 세겨진 내용을 살펴보면“이 나라 서남쪽 차령산맥 중간에 흑산성이 목천(木川)을 남으로 천안을 서로 안성을 북으로 진천을 동으로 하여 우뚝 솟았으니, 이곳은 역사적으로 무수히 전란(戰亂)을 치른 곳이다.
고려 말기에 홍건적(紅巾賊)과 적들이 끊임없는 침범으로 혼란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한 분이 있으니 공의 휘는 사혁(公 諱 斯革)이요. 자는 문위(字 文위)이며 호는 절정(號 節亭)이요 시호는 충절(諡號 忠節)이고 명주인(溟州人)이니 지금의 강릉이다.
공의 연원은 신라 태보공 휘 알지를 시조(新羅 太輔公 諱 閼智 始祖)로 해 라조(羅祖)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이어 오면서 삼국통일을 성취한 태종무열대왕(太宗武烈大王)이다.
태종무열대왕의 육세손 휘 주원공(六世孫 諱 周元公)이 왕위를 경신(敬信. 원성왕)에게 사양하고, 외향인 명주로 입향해 은거(外鄕 溟洲 入鄕 隱居)함에 그 후 원성왕이 공을 명주군왕(元聖王 公 溟洲群王 封)으로 봉하고 식읍(食邑)을 정하니 이로 인해 공이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시조(始祖)이시다.
후손들이 국가에 끼친 공이 헤아릴 수 없어 김부식이 삼국사기(金富軾 三國史記)에 출장입상의 가문(出將入相 家門)이라 기술하였다.

▲ 김사혁 전적비(후면)

려조에 문정공 휘 상기(麗朝 文貞公 諱 上琦)와 문성공 휘 인존부자 (文成公 諱 仁存 父子)를 전후(前後)해 시중 평장사 상서(侍中 平章事 尙書)를 무수히 배출했다.
군왕으로 부터 후 18세 이르러 증 금자광록대부 정당문학 참지정사 상장군 겸 판형부 상서 행 정의대부 전리사총랑 휘 광갑(贈 金紫光祿大夫 政堂文學 參知政事 上將軍 兼 判刑部尙書 行 正議大夫 典理司聰郞 諱 光甲)은 공의 부친(公 父親)이며 공이 태어나서 자질이 중오해 성장하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나 기마와 활을 잘 쏘니 장군의 재목이라 추앙(推仰)했다.
공이 26세에 태관서승(太官署丞)에 보직돼 융금(戎禁)의 무기를 관리했다. 공이 충목왕 원년 을유(忠穆王 元年 乙酉)에 흥왕의 변(興旺之變)을 토벌(討伐)한 공으로 숙부인 삼사우윤 겸 군기감 휘 광을(叔父 三司右尹 兼 軍器監 諱 光乙)과 함께 1등에 올랐다. 당시 직위는 호군(護軍)이었다.
우왕 3년 병진(禑王 三年 丙辰)에 전라원사 유영(全羅元師 柳濚)이 왜구(倭寇)를 전라도 영암(全羅道 靈巖)에서 격퇴(擊退)하니 왜적들이 부여(扶餘)에 이르러 당시 공주목사(公州牧使)였던 공이 정현(鼎峴)에서 적을 맞아 싸워서 승리했다.
우왕 7년 경신(禑王 七年 庚申)에 전라도 광주 능성 화순(全羅道 光州 綾城 和順)등지에서 원사 최공철(元師 崔公哲)과 함께 김용휘, 이원주, 정지 오언 민백훤, 왕승보, 도흥(金用輝 李元柱 鄭地 吳彦 閔伯萱 王承寶 都興)등과 공이 함께 왜적을 무수히 섬멸(殲滅)하고 격퇴(擊退)했다.
공은 전공으로 전리사판서(戰功 典理司判書)에서 양광도 도순문사(楊廣道 都巡問使)가 되고, 같은해에 왜적이 부여, 정산, 운제, 고산, 유성(扶餘 定山 雲梯 儒城) 등지에 침입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아이, 노약자들은 적을 피해 계룡산(鷄龍山)에 올랐다.
적이 많은 백성들을 살해함에 공으로 하여금 양광도 원사(楊廣道 元師)를 삼아서 적을 격퇴하니 적이 청양, 신풍, 홍산(靑陽, 新風, 鴻山)등지를 걸쳐 패주(敗走)함에 공이 추격(追擊)해 임천(林川)에서 무수히 섬멸(殲滅)했다.
우왕 10년 계해에 공주 반용사(禑王 十年 癸亥 公州 盤龍寺)에서 문달한 안덕흥, 안경, 박수년 (文達漢 安德興 安慶 朴壽年)등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고, 동년 괴주 장연(槐州 長淵)등지에서 안흥덕(安興德)과 함께 왜적 200여 명을 격퇴, 남은 자를 참수(斬首)했다.
동년에 왜선 28척이 축산도(丑山島)에 정착하고 침범해 당시 양광도 상원사(楊廣道 上元師)인 공이 격퇴(擊退)하니 왜적들이 목천 흑성산(木川 黑城山)으로 패주(敗走)했다.
공이 남은 자 없이 섬멸(殲滅)하고, 국태민안에 기틀을 만들었으니 공이 국가에 바친 충성과 절의를 감히 글로 다하랴. 공의 련민(憐憫)에 정(情)을 후인(後人)들이 어찌 따르리.
공이 지문하부사 익위공신 광정대부 상의첨의 도찰사로 홍무 임신(知門下府事 翊衛功臣 匡靖大夫 商議僉議 都察使 洪武 壬申)에 정침(正寢)하시니 국가에서 예장하고 증시 충절(國家 禮葬 贈諡 忠節)이라 했다.
공이 서거(逝去)하신지 600여년, 위대하신 충절과 덕의를 추모해 뜻있는 인사들이 공의 행장과 전적(公 行狀 戰蹟)을 요약해 편돌에 새기어 공의 마지막 전적지(戰蹟地)인 흑성산에 세워 귀감으로 영원토록 전해지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대한민국 광복 48년 임신 4월, 단기 4325년 임신 월 일(1992년)
정치학 박사 경주후인 최 창규(崔昌圭) 짓고 19세 방후 손 진해(傍 後孫 振海) 쓰고 천안군수 남원후인 윤병렬(尹秉烈) 세움이라 기록돼있다.
이는 천안향토회 김종식 연구사가 천안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김종식 연구사는“역사는 흐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이는 수없이 많다”며 “위대한 조상의 넋을 기리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요. 마땅히 우리가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