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재조명 기획14]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인물재조명 기획14]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임진왜란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5충신인 김응상 장군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6.03.06 18: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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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응상장군 묘소(왼쪽)과 김응상 장군이 전장에서 함께 했던 말 무덤.

 


임진왜란때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김응상 장군을 아는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직산현의 5충신 중 한 사람이었던 김응상 장군에 대해 소개하려한다.
김응상 장군은 선조 때의 사람으로  당시 북경에서 오랑케들이 침범해 나라를 어지럽게 하자, 나라를 구할 인재를 찾던 중 신하 곽흘과 남치훈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천거를 했다.
선조는 북쪽이 급변하면서 위급하게되자, 이순신장군은 고향인 온양에 있어, 김응상을 불러 지휘도를 주면서  출전케 해 많은 적을 물리치다 절명하게된다.
김응상 장군이 황해도 육진에서 전쟁을 하던 중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말에 대해 소개하려한다.
김응상 장군이 전장에서 군을 수습하며 독려 하던 중 매복해있던 적군들이 급습으로 인해 많은 화살을 맞고 절명했다. 미물도 그 슬픔을 알고 주인인 김응상의 시신 일부를 물고 집 앞에서 쓰러져 죽었다.
집에서는 장군이 죽음을 알고 임지로 사람을 보내 시신을 모셨고 김응상이 아끼던 말과 함께 묻어 위로 해 주었다.
선조는 김응상에게 좌승지를 내리고 공을 치하 하는 한편 자손들을 특별히 보살펴 주라는 교시도 내렸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전란으로 김응상장군의 정려가 있던 자리는 실전하고, 성거읍 성거산 아래 천흥리 물왕골 언덕에 장군의 묘와 전장을 누비던 말의 무덤도 함께 전하니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이후 고경명, 이순신등 21인의 행적을 엮은 ‘임진전망록’에 전하고 있다.
김응상에 대해 좀더 알아 보기로 한다.
공(公)의 휘(諱)는 응상(應祥)이다. 선조때 의성군(義城君) 황림(黃琳)의 생질(甥姪)로 종계변무사행(宗系辨誣使行)에 수행(隨行)했다. 선조기축년(宣祖22년1589)11월에 주청사(奏請使) 윤근수(尹根壽)등과 전후의 주청사(奏請使) 황정윽(黃廷彧)등이 정정(訂正)된 책을 바치고 그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올랐다.
공은 오위사정(五衛司正)으로 신묘년(선조24년1591) 윤3월에 광국원종공신 삼등(光國原從功臣 三等)에 올랐다.
록권(錄卷)의 교문(敎文)에 “해와 별같이 빛나게 인륜을 밝히니, 나라가 새로워지도다. 재조(再造)한 것에 대해 공을 보답함에 대소 없이 공을 상 주나니, 어찌 뒷날로 미를 수 있으랴. 이것은 상법(賞法)대로 하는 일이지 사사로운 은혜에서 나옴은 아니로다. 생각해보면 십 팔대에 걸친 지원극통한 일로써 천만년에 없던 일이라 해동(海東)이 온통 오래도록 금수(禽獸)로 무함(誣陷)되니 내 어찌 임금 일을 즐거워하랴. 북극성을 향하여 항상 간절히 하늘에 호소하며 욕심 것 사는 것으로 만족히 여길 수 없었다.
비밀 전적도 남김없이 전질(全帙)을 가볍게 보이며 숨기지 않고 무고한 관계의 정정함을 꾀했다. 그래서 한둘의 신하가 전후로 신명을 다해 힘쓴 충성에 말미암고, 또한 약간 인이 노력한 도움에 힘입어 명나라에서 잘못 기록한 종친의 계보를 고치고, 내게 조혼 올림을 감히 받고서 사양함이 없지 않았다. 하늘에 계신 열성(列聖)께 공이 빛나니, 내 이에 이르러 수명(受命)에다 비기노니 은전(恩典)이 또한 타당한 바이다.
고로 위로는 경사대부(卿士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서리예복(胥吏隸僕)에 까지 미력(微力)과 소공(小功)이 있으면 일을 나눠 이룬 바를 빠짐없이 수륵 했나니, 중(重)하고 경(輕)한 등급이 비록 한결같지는 않으나 신하됨에 있어 귀하고 천함이란 없도다. 힘써 국가와 더불어 아름다움을 같이 할지니 이에 가상(嘉賞)하노라, 그걸 잊을 수 있으랴. 내 공정하게 상세히 알고 있음을 교시하노라”며 김응상 장군을 치하했다.
공(公)은 소년때 부터 문무겸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선조 1583년(宣祖16년) 계미삼월(癸未) 육진에 오랑캐 니탕개(尼湯介)가 이웃 부락 추장 오을기내(汚乙其乃)와 율보리(栗甫里)등과 합작 노략질하거늘 경원부사(慶源府使) 김수가 출전했다가 패했다. 적이 경원 아산 안원(慶源 阿山 安原)등의 진보(鎭堡)를 연달아 함락하고 종성진(鍾城鎭)을 포위했다. 온성부사(穩城府使) 신립(申砬)이 추격해 강을 건너 오랑캐 도적의 소굴을 소탕하자 참찬 정언신(鄭彦信)을 보내 육진을 순찰했다.
금상께서 비변사(備邊司)에 명해 각각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곽흘(郭屹)이 공(公)을 천거했다. 재신(宰臣) 남치근(南致勤)도 연석에서 진언하기를 “무신중에는 이순신(李舜臣)이 있고 선비 중에는 김 모가 있어 다 탁용 할 만 합니다”고 하였다. 절제사 증 승정원 좌승지공 사적기에 전하고 있다.
당시 변방의 보고가 날로 급박한데, 하루는 홀연히 부리는 명령이 내려 공이 백의(白衣)로 대궐에 이르니 궁중편전에서 인견하고 북 변사를 위임했다. 곧 절제사(節制使)를 특임하고 차고 있던 칼을 하사하는 등 대은(大恩)을 많이 내렸다. 공(公)이 즉시 명을 받들고 출정해서 육진에 나아가 연정연승했다.
잠시 군을 정비하며 순찰을 하는데 적의 기습으로 공(公)이 결사적으로 항전하여?싸우는데 날아온 화살이 몸에 가득 꽂혔다. 손수 화살을 뽑으며 좌우에게 말하기를 “내가 상처를 입었음을 말하지 말라 적들이 동요할까 두렵다”하고는 종일 혈전을 하다가 전쟁터에서 운명했다.
부음을 들은 선조는 크게 슬퍼하며 좌승지(左承旨)를 특별이 증직(贈職)하고 전교(傳敎)를 내려 말을 주어 그 아들을 보내 반장(返葬)하게 하고 탈상을 기다려 그 자손을 등용 토록 명했다.
직산 현지에 따르면 당시 직산군 이남면 천흥리(현, 천안시 성거읍 천흥리)에 충신의 정려가 있었고, 5충사를 건립하려고 나라에서 허락은 했으나 소요 경비를 마련치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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