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재조명 기획15]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인물재조명 기획15]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직산 5충신인 황세득, 황박(黃世得 黃珀) 부자”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6.03.1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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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세득, 황박(黃世得 黃珀) 부자 정려


이번엔 직산현 5충신의 하나였던 김응상 장군에 이어 황세득, 황박(黃世得 黃珀) 부자에 대해 소개한다.
직산읍 마정리 미륵산 아래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성주황씨 부자(星州黃氏 父子)의 정려가 있다. 
직산 현지와 성주황씨 족보에 의하면 직산의 5충신으로 아버지 세득(世得)은 바다에서 아들 박(珀)은 남한산성에서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난세의 영웅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정려는 정 측면 한 칸의 옛 건물을 헐어내고, 지난 2001년에 신축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방풍판을 설치했다. 전 후면은 홍살을  원형 초석에 원주를 세웠다. 현액은 내부의 좌우로 2매가 걸려 있다.
좌측은 “충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통정대부 장흥도호부사 황세득 지려(忠臣 贈 嘉善大夫 戶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 行 通政大夫 長興都護府使 黃世得 之閭)”
우측은 “충신 증 자헌대부 공조참판 겸 의금부사 행 가선대부 의주부윤 겸 병마첨절제 대도호부사 황박 지려(忠臣 贈 資憲大夫 工曹參判 兼 義禁府事 行 嘉善大夫義州府尹 兼 兵馬僉節制 大都護府使 黃珀 之閭)”가 쓰여 있다.
황세득(黃世得)의 자는 사구(士求)다.관향은 성주(星州)고,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이다. 고려조 금자광록대부(高麗朝 金紫光祿大夫)황석계(黃石桂)의 17세손이며, 조선조 중훈대부사헌부감찰 증 좌승지 황종식(朝鮮朝 中訓大夫 司憲府監察 贈 左承旨 黃鍾植)의 아들이다.
1537년(중종32년) 정유(丁酉)에 직산 양전리에서 출생했다. 명종19년(1565), 24세에 무과에 급제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三道水軍統制使 李舜臣)의 휘하에서 활약했다.
처 종형(妻從兄) 통제사 이순신은 공의 제주가 탁월하고 용맹이 큼을 평소부터 칭찬하며 아꼈다.
무술년(1598)9월에는 도독(都督) 유정(劉挺)이 군사 1만5000명을 거느리고 예교(曳橋) 북쪽에 와서 진을 쳤다. 10월에는 우리 수군과 함께 왜놈 오랑캐를 공격키로 약속했다.
이순신이 도독(都督) 진린(陳璘)과 함께 전쟁에 나가 전선(戰船)을 재촉해 독전할 때, 세득(世得)이 먼저 나아가 무수한 왜적을 사살했다.
왜적의 두목이 분노해 총포를 세득에게 연속 발포해, 세득이 탄환에 맞아 절명 할 때 이순신은 가슴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후에 잠곡(潛谷) 김육(金堉)이, 이 충무(李忠武)의 묘지(墓誌)를 지을때 세득의 공을 세운 사적을 병기했다.
숙종 병술(1706)에 고을 사람들이 소청(疏請)해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명하고, 호조참판을 증작(贈爵)했다.
그 후로 방백과 유림들의 공의로 상소해 숙종 30년(1704년, 갑신 5월 17일)에 정문을 세우고,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증직 하니 잠곡(潛谷)김육(金堉)이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의 묘지명(墓誌銘)을 찬할 때 공의 사적을 또한 기록했다.
또,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려수 충민사기(麗水 忠愍祠記)에도 공의 사적을 기록했다.
항박(黃珀)은 본관이 성주로 임진왜란의 명장 황세득 장군의 아들이다. 자는 백옥(伯玉)이요, 시호(諡號)는 장열(壯烈)이다.
선조 6년 계유(癸酉)에 출생해 선조 25년(1592)에 무과에 급제했다. 의주부윤(義州府尹)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러 노령으로 고향인 직산에 머무르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자진 출전해 진중에서 전사, 인조 14년(병자 1636년) 향년 64세의 일기였다.
공은 지략과 병사에 밝았으며 천문지리에 능통했다. 광해군 13년 신유(辛酉)에 명나라 사신 양우(揚雨)가 사신으로 조선에 와 있을 때 마침 후금(後金)이 요양(療養)을 함락해 만주(滿洲)를 석권(席捲)했을때라 양우가 율로 돌아 갈수 없어 수로(水路)를 택해 공이 개연히 청행(請行)해 명사라 사신양우를 호송(護送)하고 돌아왔다.
인조 병자년 겨울(仁祖 丙子 冬 1636)에 청나라 태종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공은 종복 팽금(彭金)과 백여 개의 활과 화살을 갖고 즉일 출전했다. 공은 맹렬(猛烈)히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운명할 때 까지 한 치의 후퇴도 없었다.
그 후 숙종(肅宗) 30년에 비로소 공의 부자(父子) 정문을 세우게 하고 공에게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추증(追贈)했다.
다시 6년이 지난 후 직산의 방백(傍白)과 유생(儒生)들이 모여 직산출신 5충신의 행적을 적어 사당을 세워 혼영을 위로코자 숙종 때에 상소해 윤허를 얻었으나 소요 자금을 마련치 못해 끝내 사당을 짓지 못했다.
천안향토회 김종식 연구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공들의 업적은 잊혀지고 길거리 야산의 한 정자만이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며 “지나는 이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또 그는 “400여 년 전의 어른들은 나라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며 “그 선인들의 고귀한 그 정신을 본 받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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