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재조명 기획17]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인물재조명 기획17]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김진희(金晉熙)”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6.03.27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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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희 비석.

김진희는 조선시대 충신으로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반도를 소탕하는 데 큰공을 세웠다.
본관은 김해(金海)며, 자는 겸숙(兼叔)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 김이환(金李桓)이다.
효성이 지극해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흘려 넣었으며, 끝내 돌아가시자 삼 년 동안 시묘 살 이를 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으로 인해 우후(虞候) 박종원(朴宗元)이 성을 내주고 투항하는 등 민심이 소란스러워지자 이진우(李震遇), 조중염(趙重廉)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반도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때 청주 상당성 아래 살았는데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았다.
1788년(정조 12) 도백(道伯) 홍억(洪檍)의 장계로 증작(贈爵)되고 ‘충헌(忠憲)’이라는 시호와 ‘충효양전(忠孝兩全)’의 정려를 받았다
김진희는 청주 상당성 근처에 살았는데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 상당성을 접수 하고 고을을 어지럽힐 때 분연히 충의로 일어나 연세가 많으신 어머니 한태 사정을 말씀드리고 출전하려 할 대 어머니가 극구 말렸다.
진희가 “말하기를 내일 정오까지 돌아오겠노라”고하자 어머니는 “내일 정오까지 오지 않으면 나는 니가 잘못 된 줄 알고 죽겠노라” 하였다.
그길로 출전하여 밤에 상당성을 습격하여 적의 괴수의 목을 베고 상당성을 되찾고는, 휘하 장수에게 성을 인계 하고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려 집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나라를 위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충이요, 어머니와 약속을 지킨 것은 효이니, 총·효 양문을 내리니 이는 참을 드물고 휘유한 일이 되어 목천 고을에 오래도록 구전되었다.
충· 효 양문을 목천군 읍내면 교촌리 (속칭 향교 말) 향교 출입문 옆에 세워서 고을의 많은 이 들이 보고 귀감이 되도록 하였는데, 세월이 흘러 정문은 퇴락하여 무너지고 비석만이 외로이 서 있다가 60년대 말에 목천면 서리 성말 또는 외딴 말 묘소 앞으로 이전하였다.
현재 목천 중학교 정문 옆의 묘소가 있는데  난세에 의병을 일으킨 김진희의 묘소이다. 묘소 앞에 서있는 오래된 비석이 김진희의 충·효 양 정려 비이다. 
후손들의 구전에 의하면 젊어서는 청주 상당성 부근에서 , 노년에 목천군 읍내면 교촌리로 이사와 살았다는 것이 문중의 정설로 여기고 있다. 공의 후손이 목천읍 교촌리에 살고 있고, 묘소와 정려가  목천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다.
현재 묘소 앞에 전하는 비문에는“ 충신 효자 증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 숭록대부지 중추부사 김진희 지비 상지 팔년 무진 삼월 십팔일 충효 양전 명정(忠臣 孝子 贈 崇綠大夫 判中樞府事 兼 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行 崇綠大夫 知 中樞府事 金晉凞 之碑 上之 八年 戊辰 三月 十八日 忠孝 兩全 命旌)”이라 기록돼있어 충신 효자 정문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구 한 말에 목천의 유림들이 발의하여 만든 대록 삼강 실록 충의 편에는 행적을 기록하여 전하며, 향토사가 김종식과 교사 권선길 두 분이 번역하였다. 번역본에 의하면 “김진희는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자(字)가 겸숙(謙叔)이니, 좌상(左相) 김우항(金宇杭(김우항)의 조카이다. 여력이 출중(出衆)하고 담략(膽略)이 있었으며, 청주(淸州)의 상당성(上黨城) 아래에서 우거(寓居)하였다.
무신난(戊申亂) 때 반란군의 위병사(僞兵使) 신천영(申天永)이 상당성에 웅거(雄據)하고 있었다. 김진희는 비분(悲憤)을 이기지 못하여 의병을 일으겨 토벌하고자 친척과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말하기를, “난적들이 국가의 두 장수를 죽이고 왕성(王城)을 침범하려고 하니, 나는 성안의 난적들을 다 죽이려 한다. 누가 능히 나를 따르겠는가!”라고 하자, 따르는 의병이 70여 명이었다. 이 때 80된 노모가 말하기를, “니가 이제 반적들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니 내가 장차 먼저 죽으련다.”라고 했다. 김진희가 아뢰기를, “해가 정오(正午)가 되지 않아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하니, 노모가 말하기를,“니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나 또한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진희는 곧장 난적의 소굴로 쳐들어가 힘써 토벌해 사로잡았다.
해가 아직 정오(正午)가 되지 않았을 때, 박민웅(朴敏雄)이 와 김진희가 말하기를, “나는 모친과 약속을 하였으니, 지금 돌아가지 않으면 모친이 반드시 위태로울 것이다.”하고, 마침내 포박하였던 여러 적들을 참수하여 그 공을 박민웅에게 양보하고, 돌아가서 노모를 구하였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이 ‘김장군전’을 지었다. 그 후 정조대왕 12년 무신(戊申;1788)에 판부사(判府事)에 추증하였다, 당저 무진(戊辰;1778)에 충효려(忠孝閭)를 표창하였다.
자손 낙현(洛鉉)이 교촌(校村-향교말)의 옛터에 살고 있다.
공조참판 김자항(金字恒)의 아들이다. 상신(相臣) 김우항(金宇杭)의 서질(庶姪)이다. 할아버지는 김홍경(金洪慶)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김덕승(金德承)이다.
또한 청주시의 자료에도  김진희에 대한 기록이 전해져온다. 기록에 의하면 서울에서 살다가 청주·상당산성 아래로 이사하였다.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였고, 체력이 남달리 뛰어나 남대문루를 뛰어넘었다 한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일명 무신란)이 일어나 목사 박당은 도피하고 우후(虞侯) 박종원(朴宗元)은 성을 내주고 투항하니 역도의 무리들이 청주를 쉽게 점령해 버렸다.
이에 앞서 김진희(金晉熙)는 우후 박종원을 만나 성을 지킬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 뜻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는 80노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창의할 것을 결심한 후 주교(州校)로서 낮 익은 이진우(李鎭遇), 조중렴(趙重廉)과 약속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청주성에 도착하여 역도의 무리를 유인하고 위협하니 내응자 들이 성문을 쉽게 열어 주었다.
이에 술에 취한 이인좌의 부하 신천영(申天永)을 찾아 목베고, 이인좌의 동생 이기좌(李麒佐)를 사로잡아 적당을 소탕하였다.
그 때 마침 노모가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고 향인(鄕人) 박민웅(朴敏雄)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그때의 일로 논공(論功)에서 제외된 채 나머지 12장(將)만이 녹훈되었는데, 1788년(정조 12)에 빠진 자를 다시 포상할 때 시호와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한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영조 5년에 일제히 포상할 때에 전 별장(別將) 김진희에게 미포(米包)를 내렸다는 기사가 있고, ‘정조실록(正祖實錄)’에도 박민웅에 가려 포상이 안 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김진희의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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