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재 조명하다-기획20] 천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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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부원군 한명회 신도비 4편”
  • 김헌규 기자
  • 승인 2016.12.0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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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년 경자년에 왕비 윤씨 책봉(冊封)과 궁시용수우각(弓矢用水牛角)구입에 관하여 명나라에 주청(奏請)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노한(老韓)은 충성하고 정직한 선비다. 라고 하여 명나라 헌종(明國 憲宗)은 주청한 대로 들어주었다.
1483년 계묘년에는 세자 책봉을 주청(奏請)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갔었는데 이 해에 공의 나이 69세로 멀리 여행하는 것을 모두 두려 읊게 여겼는데 공은 “중한 은혜를 입고 후한 녹을 먹는 신하로서 나라를 위하여 일선에서 죽어 마혁으로 시체를 싸도 이의가 없는데 더욱이나는 명나라에 관광 예방(禮訪)을 가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장하게 여겼고 임금은 사정전(思政殿)에서 연회를 열어 환송하였다. 명나라에 도착하자 헌종(明國 憲宗)은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그 충성하고 정직한 노한(老韓)이 두 번째 왔구나”하며 서대(犀帶) 채단(綵緞) 백금(白金)등을 하사하였다.
환국할 때는 궁내사(宮內使)를 보내어 통주(通州)까지 환송하였다. 지중한 대우는 지금까지 없는 일이었다.
공이 일찍이 “조상 때부터 압록강 상류와 하류에 장성(長城)을 쌓아 왔으나 공사가 거대하여 완성을 못하였는데 신의 의견으로는 그것을 수리하는 것이 마땅하오”하는 글을 내었는데 임금은 좌의정 홍응(左議政 洪應)을 파견하여 성을 수축하였다. 이 해 가을에 공은 노병으로 사임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은 친서를 하사하여 “훈공은 누대에 제일이요, 재주와 식견은 당대의 누구보다도 훌륭하다. 한 마음 한 뜻으로 임금을 섬기고 백가지 천 가지로 나라를 근심하며, 공의 의견을 생각하여 보면 이치에 맞고 그의 말대로 실행하면 성공이 있다. 원로(元老)는 조정에 있으면 나라의 영예요, 임금의 좌, 우에 있어서 협력하면 임금의 수족이다. 병에 걸 린지 오래되었지마는 약을 많이 내릴 테니 조호에 적극 노력하여 나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라. 경의 몸이 편안한 뒤에 사임을 하면 나도 옛 신하를 버렸다는 책임이 없게 된다”고 하였다.
1484년 70세 때 또 사임을 요청하였으나 나라에서는 들어주지 아니하였고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다음 해 풍덕(豊德)온천에 요양하러 갈 때 궁내사(宮內使)를 보내어 주찬을 하사하고 “경은 나라에 있어서는 원훈(元勳)이요, 마을에서는 나이도 많고 덕행도 잇는 사람이며 사직(社稷)에 있어서는 하늘에서 내려준 기둥이요, 나에게는 모든 음식에 간을 알맞게 하는 염매(鹽梅)가 된다”는 말이 적혀 있는 친서를 하사하였다. 1484년 다시 요양 차 풍덕(豊德)에 갔다 올 때도 임금의 친서와 위문이 그 전과 같았다.
이 해 겨울에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자 임금은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고 날마다 궁내사(宮內使)를 보내어 문병하였다.
병이 위독하자 승지를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이 없느냐고 하였는데 공은
“성상은 모든 임금에서 뛰어난 임금이시다. 우매한 신으로서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마는 다만 이 몸이 먼저 죽어 성대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만을 한스럽게 여기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은 사신을 계속 보내었는데 공은 마지막 눈을 감으려다가 사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관대(冠帶)를 몸 위에 걸치고 목 안에서부터 잘 나오지 않는 말로 “성상의 은혜는 지극하나이다. 처음은 잘하나 마치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니 시종여일하시기를 바라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향년 나이 73세, 임금은 애도하는 뜻에서 찬(饌)을 덜고 조회를 쉬고 사신을 보내어 “경(卿)의 훈공과 덕은 이 세상에 둘도 없다. 다른 신하에 비할 것이 아니며 더욱이 나에게는 한 집안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애도지염이 그지없다”는 조위를 하고 부조와 제사 비용을 가 1등으로 하사하였고 백관이 다 모여서 장사하라고 하였다.
공의 죽음을 듣고 원근 친지가 다 슬퍼하였으며 우동마졸(牛童馬卒)까지도 애석히 여겼다.
공은 도량이 너그럽고 사려가 심원(深遠)하고 거룩한 얼굴과 큰 몸집으로 보기에도 위엄이 있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호걸(豪傑)들과 사귀어서 놀 때 그 규모와 기개가 모든 사람에서 높이 뛰어나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장래에 나라의 3공 4보(三公四輔)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오래 하급(下級)으로 있었으나 스스로 마족하게 여기고, 세조(世祖)를 만나자 중신(重臣)이 되어 국가의 중요정책을 결재하고 계유(癸酉)의 대난을 평정하였다.
벼슬이 없는 선비로서 수년 내에 재상이 되어 국사(國事)를 처결하는데도 자신이 만만하였다.
정무(政務)는 대체를 주로 하고 세쇄한 문제는 파고들지 않았다. 세(三) 조정에 벼슬을 역임하고 나가면 장군이요, 들어오면 재상이 되었고 네 차례 공신에 1등이 되어 그 공은 역사에 드물었고, 다섯 번이나 조정에 어른이 되어 온 세상에 그보다 위가 없었다.
임금의 인척(姻戚)으로 다시 국구(國舅.장인)가 되었다. 어느 사변이나 성공을 하였어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머리를 수그렸으며 나라의 주춧돌이 되어, 안위(安危)를 책임진 지 30여 년 동안 공명과 부귀와 복록의 성대함이 고금에 비할 데 없었다.
[충남일보 김헌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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