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98호 부여 보광사지
[우리지역 문화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98호 부여 보광사지
  • 이훈학 기자
  • 승인 2018.05.22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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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일보 이훈학 기자] 보광사는 창건과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지만, 보광사의 중창을 기념해 건립한 ‘高麗林州大普光禪寺重 碑’를 통해 중창을 주도한 圓明國師 沖鑑(1275~1339)의 행적과 중창 과정을 알 수 있다. 

충감은 禪源寺 출신으로 중국 유학 후 귀국해 간화선풍을 널리 퍼뜨렸고, 선종 승려들의 생활규범을 정리한 禪門淸規의 보급에도 힘썼다.

한편 1336년에 원명국사가 개경을 떠나 보광사로 오자 지방관과 충감의 가족들이 물자를 시주해 보광사를 크게 중창했고, 이후 이곳에는 그의 문도들이 주석하게 됐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보광사가 성주산에 있고, 차군루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외 忠淸道邑誌와 ‘湖西 地圖’, ‘朝鮮地圖’, ‘海東地圖’, ‘廣輿圖’, ‘地乘’ 등에도 ‘普光寺’가 기입돼 있다.

한편 1872년에 제작된 ‘林川 郡地圖’에는 ‘普光寺舊址’로 표시돼 있어 보광사는 늦어도 19세기 후반경에는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광사지에 대한 일제강점기 자료로는 ‘朝鮮寶物古蹟 調査資料’가 있다. 이 자료에서는 ‘보광사지에 고려임천 대보광선사비 1기가 있다’라는 내용이 기술돼 있다.

사지에 대한 기존 자료에서는 수십 년 전에 부도에서 小 珠와 璧이 출토돼 부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하고,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는 비문 보호를 위해 1963년 1월 부여박물관으로 이전됐다고 한다.

1987년 자료에 의하면 사역은 단을 이룬 답으로 개간됐고, 부도 등 많은 유물이 있었으나 흩어지고 석조 1개와 축대, 초석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연주문 내에 범자문이 양각된 와당이 수습됐다고 한다. 사찰은 고려 말과 조선중엽까지 유지됐고, 임진왜란으로 폐사된 후 다시 재건됐으나 현재 폐허화돼 있다고 한다.

조사구역 현황 보광사지는 가신리 성주산 산기슭에 위치한다. 사역은 보광선원을 중심으로 그 앞쪽 경작지 일대로 대규모 사찰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역 상단부에는 전주이씨 묘가 조성돼 있고, 그 앞쪽으로 비좌 1기가 남아 있다. 

사역 북쪽으로 대웅전이 건립돼 있으며, 대웅전 앞마당에는 다량의 석조물들이 산재해 있다. 대웅전 북쪽으로는 현재 민가 몇 채가 있다. 사역 동쪽에는 민묘와 밭이 조성돼 있는데, 민묘 상단에는 사찰 유구로 추정되는 석축이 일부 남아 있다.

유구 묘역 위 평탄지 크기는 21×16m 정도이고, 평탄지 앞쪽(남쪽)으로는 길이 21m, 높이 1.2m 규모의 석축이 있다. 측면에도 길이 4.86m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다.

유물은 사역에서 전체적으로 확인되는데 특히 보광선원 인근보다는 그 앞쪽 경작지와 민묘 일대에서 많이 보인다. 유물은 어골문, 집선문, 기하학 복합문, 중호문, 수 파문, 무문 와편, 명문 와편, 전편, 청자편, 흑유자편, 백자편 등 다양하다.

소재문화재는 보광선원 경내에 석탑 옥개석 2매와 승 탑 옥개석 1매, 상대석 1매, 상륜부재, 수조, 승탑 탑신석 2매, 맷돌 1매, 비좌가 남아 있고,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이동된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비가 있다. 

석탑 옥개석1은 너비 56㎝, 높이 21㎝이다. 하단에 3단 각형 괴임이 치석돼 있으며, 상부에는 1단 괴임이 있다. 석탑 옥개석2는 너비 72.5㎝, 높이 25㎝이며, 하단에 3단 각형 괴임이 치석돼 있고, 상부에는 2단 괴임이 있다. 

승탑 옥개석은 전체 너비 88㎝, 높이 27㎝이고, 상부에는 지름 11㎝, 깊이 6.5㎝의 홈이 파여있다. 상대석은 승탑재로 추정되고, 너비 36㎝, 높이 18㎝로 연화문이 조각돼 있다. 

상륜부재는 승탑재로 추정되고, 현재 옥개석 위에 올려져 있다. 석재는 옥개석 상부에 꽂히는 촉과 노반과 보주로 구성돼 있다. 전체 높이는 33㎝이다. 촉은 원형으로 지름 14㎝, 높이 7㎝이다. 노반은 사각형에 모죽임을 한 형태이며, 지름 19.5㎝, 높이 17㎝이다. 보주는 반원형으로 지름 13㎝, 높이 9㎝이다. 수조는 160×120×55㎝로 상부에 너비 100×102㎝의 타원형 홈이 파여 있다. 

수구 너비는 23㎝이고, 타원형 홈 안에는 지름 10㎝, 깊이 17.5㎝의 원형 홈이 파여 있다. 승탑 탑신석1은 석종형이고, 크기는 높이 61㎝, 최대 너비 54㎝이다. 하부에는 너비 26㎝, 깊이 12㎝ 정도의 사리공이 파여 있다. 승탑 탑신석2는 석종형으로 상부가 깨져 있고, 크기는 현재 높이 63㎝, 최대 너비 43㎝이다. 

맷돌은 지름 56㎝이며, 상면에 지름 8㎝, 깊이 8㎝의 원형 홈이 파여있다. 비좌는 160×120㎝로 상부에 136×43㎝ 크기의 방형으로 치석했고, 그 위에 86×15㎝의 방형 비좌홈을 만들었다.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이동된 부여 보광사지 대보광선사 비는 보물 제107호로 지정돼 있다. 

이 비는 고려 원종 때 보광사를 중창하고 이곳에서 입적한 원명국사(1275~ 1340)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258년에 세운 것이다. 비석은 편마암제이며, 상단의 양모서리를 모죽임한 규형이다. 비신은 크기는 높이 197㎝, 너비 113.6㎝, 두께 22.7㎝이다. 비신에는 주연에 폭 7.5㎝의 구획을 두르고 그 안에 보상화문이 조각돼 있다. 

제액은 전서로 ‘普光 寺大普光禪師碑’라 각서 돼 있다. 당초 대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없어지고 다만 비신을 끼웠던 흔적만이 남아 있다. 크기로 보아 현재 보광사지에 남아 있는 비좌와는 맞지 않는다. 

전면에 새겨진 비문은 충감 제자인 당시 선원사 주지 宏演이 원나라에 건너가서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危素에게 부탁해 찬하였고, 원나라 사람인 楊池와 周伯琦가 각각 본문과 篆額을 썼다. 

후면은 1750년에 당시 주지인 能一스님이 개각한 것이다. 현재 비석면의 풍화가 심해 글씨를 잘 알아보기 어렵고 불에 그을렸었던 자국이 있다. 비문에 의하면 당시의 보광사의 규모는 500칸이 넘는 웅대한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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