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뜨랑제의 SNS 미술관] 꽃신 신고 갈게요
[에뜨랑제의 SNS 미술관] 꽃신 신고 갈게요
  • 김기옥 사유담 이사
  • 승인 2018.06.26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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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옥 사유담 이사]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오라비는 시집가는 하나 밖에 없는 동생에게 꽃신을 선물한다. 오다 주웠다는 듯이 동생 방 앞에 두고 사라진다.

그 신을 신고 시집가려는데 곰 같은 오라비는 동생 발사이즈도 몰라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컸다. 그 날 하필 청나라가 쳐들어왔고 새색시는 맞절하다 말고 짐승처럼 끌려갔다. 그때 한쪽 신은 벗겨지고 한쪽 신은 발에 꿴 채 압록강을 건너는데… 오라비는 남겨진 꽃신을 들고 활 한자루를 메고 동생을 구하러 떠난다.

신발을 만드는 장인을 혜화장이라 했다. 혜는 목이 긴 신발이고 화는 목이 달리지 않은 신발이었다. 
조선시대 왕실 의례 신발 '석’, 사대부가 평상복에 신었던 '태사혜', 조선시대 여인들이 십장생 수를 놓아 신던 '십장생 수혜', 유아용 신 '아혜'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수혜가 바로 꽃신이다. 최고의 장인이 꼬박 보름을 일해야 만들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 가죽에 비단이 앉아야할 때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환기도 안되는 공간에서 초집중해야 했다.

비단이 곱게 앉으면 그 위에 색실로 수를 놓았다. 문양은 의뢰인의 취향을 적극 반영했다. 이렇게 친절한 이유는 가격이 터무니 없었기때문이다. 그때 시세로 쌀 한가마니 가격이었다. 20만원을 잡으면 되는 거냐고 묻는데 그 이상이었다. 5인가족이 1년 먹고 사는 쌀이 3가마니였다. 그래서 살림밑천이라는 큰 딸은 가세가 기울면 쌀 세 가마니에 팔려갔다. 그렇다면 한달 최저 식비를 50만 원만 잡아도 200만원이었다. 시댁에서 반드시 보내야 했던 웨딩슈즈였고 초고가 명품이었다. 방수따위 안되는데다 천은 더러움이 묻으면 끝이었기에 신기보다는 잠시 자랑삼아 내보였다고 보는 게 맞다. 

소박하고 예쁜 동심일 줄 알았더니 샤넬이었다. 고운 자태는 외국인에게 인상적이었고 인기 선물 품목이었다. 근대 한반도에 들어와 수많은 그림을 남겼던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꽃보다 꽃신이었다. 

이제 목화장은 대한민국에 한 분 뿐이다. 
지금은 건강하시려나

#꽃신신고 간다고하면 안되갓구나 #겁나게 비싸구나 #지네병 #구두만사지#사유담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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