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현 칼럼] 12년 만에 다시 찾은 도시, 다낭
[김창현 칼럼] 12년 만에 다시 찾은 도시, 다낭
  • 김창현 서울대학교 지리학 박사
  • 승인 2018.07.30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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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베트남 다낭에 도착했을 때, 필자는 한국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당시 베트남 여행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주로 수도인 하노이와 하롱베이, 호치민 시 정도를 떠올렸다.

다낭이라는 도시는 길쭉하게 생긴 베트남 가운데 위치해 있다. 베트남의 경주라고 할 수 있는 역사도시 후에(Hue)나 라오스 국경과도 가깝다.

무엇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관광명소 호이안(Hoi An)과 인접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당시 다낭과 호이안은 한국사람들보다는 서양인이 더 많이 찾는 관광지였다.

다시 다낭을 방문했다. 도착하자 마자 필자는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하나는 다낭이 한국보다 시원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낭이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사실이었다.
거리에는 한국어로 된 간판이 상당히 많았다. 다낭 관광청에 따르면 작년에 다낭을 찾은 한국 관광객이 80만 명이라고 한다. 엄청난 숫자다.

12년 전과 비교하여 호이안의 변화 역시 엄청났다. 2006년 필자는 호이안은 자전거를 타고 한바퀴 돌아본 적이 있었다.
한 시간 안에 얼추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호이안은 아담한 문화역사 도시였다.

이제 호이안 주변의 투본 강(Thu Bon) 강변으로 쭉 늘어선 상가는 끝이 보이지 않고, 거리는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 밤이 되자 강에는 소원을 비는 촛불을 띄우는 배가 둥둥 떠다니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관광객들은 낭만을 만끽하며 모두 행복해 보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던 해안가 도로에 이제는 고급 리조트들이 즐비해 있었다. 참족의 유물인 미선(My Sun)과 대리석이 많아 흔히 ‘마블 마운틴’이라 불리우는 오행산, 그리고 해수관음상이 서 있는 영흥사도 아름다운 자태가 그대로였다. 문화유적은 그대로 있고, 도시는 엄청나게 성장한 것을 보니, 옛 친구가 잘 된 것처럼 뿌듯했다.

12년전 필자는 1만5000동, 당시 환율로 1달러 가량 했던 쌀국수로 허기를 달랬다(현재 1달러는 약 2만3000동). 각종 향신료에 인상을 찌푸리며 국수면발을 삼켰다.

이제 제법 향신료의 맛을 알게 되었는데, 베트남에서 먹은 쌀국수에서는 거꾸로 한국 라면스프 맛이 났다. 관광객 입맛에 맞게 음식이 변화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꾸로 된 현지화(localization)라고나 할까?

당시 필자는 여행기, “질러, 유라시아!”의 베트남 편에서 세계화가 ‘느슨한 형태의 제국주의’라고 썼다. 정의로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나쳐,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지 시절이나 베트남 전쟁 등을 떠올리면서, 베트남을 낭만적 대상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때 필자는 베트남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세계화 때문에 베트남이 더 가난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기우였다. 오히려 다낭과 호이안은 자기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세계화를 일궈낸 성공사례로서 우리가 기웃거리며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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