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재 이야기] 사적 제301호 정림사지
[우리지역 문화재 이야기] 사적 제301호 정림사지
  • 이훈학 기자
  • 승인 2018.07.31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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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일보 이훈학 기자] 정림사는 사비백제의 중심 사찰이 있던 곳으로, 석탑에 새겨진 ‘大唐平百濟國碑銘’을 통해 唐 顯慶 5년(660) 이전부터 사찰과 탑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大唐平百 濟國碑銘’은 蘇定方의 紀功碑로서, 唐 高宗이 新羅 文武 王과 힘을 합쳐 백제를 정벌해 泗 城을 함락시키고 이를 討破한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 탑과 기록의 존재 이외에 사찰 창건의 시기나 명칭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1929년 사역 내에서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 라 기록된 명문 와편이 발견되면서 1028년(高麗 顯宗 19) 사찰명이 ‘定林寺’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됐다.

그러나 ‘定林寺’의 명칭은 ‘三國遺事’, ‘三國史記’ 등의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또한 탑의 명문이나 백제 시대 출토 유물 중에서도 사명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지 않아, 지금까지도 백제 당시의 사명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다만 탑의 명문 중 ‘刊玆寶刹’을 사찰에 있던 탑에 글을 새긴 것으로 해석해 탑과 사찰의 건립 연대가 이글이 쓰여진 660년 이전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정림사지는 사명 와편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명칭 자체를 알 수 없는 곳이었으며, 다만 소위 ‘平濟塔’의 존재로 인해 부여 내 가장 유명한 고적 중 한 곳으로 인식돼 왔다. 

즉 ‘新增東國輿地勝覽’을 비롯한 조선 시대 문헌에서는 ‘蘇定方碑’, ‘平百濟塔’, ‘平百濟碑’, ‘平濟塔’이라는 명칭으로 언급됐다.

그 내용은 주로 蘇定方이 이 글을 쓰게 된 경위와 撰者인 賀遂亮, 글을 쓴 權懷素 등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비문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곳이 절터라는 인식은 뚜렷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 후기 문인인 李器之의 시 ‘平濟塔’에는 ‘夕陽隣石佛’이라는 구절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7세기에도 석불이 유존했으며 또한 이곳을 오랜 절터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고적조사가 시작되자 소정방의 글이 새겨진 ‘平濟塔’은 日人들의 이목을 끌었고, 이 탑이 소재한 사찰의 존재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關 野貞, 谷井濟一, 葛城末治, 經部慈恩 등이 ‘平濟塔’ 일원을 방문하고 이곳을 백제의 주요 사찰지로 지목했다.

1916년에는 석탑의 4층 옥개석이 발견됐다. 또한 탑은 주요 유물로 인식되면서 1922년에는 탑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는 등의 보호 조치가 취해졌다.

1942년 탑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을 공원화하는 계획이 수립되자, 이에 앞서 藤澤一夫의 주도하에 주요 영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해방 이후 석탑은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됐으며, 1979~1980년에는 사역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가 실시돼 가람의 대략적인 배치 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1983년 사지는 사적 제301호로 지정됐으며, 1984, 1989, 1992년에는 사역 확인과 정비 계획 수립을 위한 발굴조사가 실시됐다. 

이어 2006년에는 사역 동편에 정림사지박물관이 건립됐으며, 2008~2010년에는 총 3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사지 복원·정비 방안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현재 정림사지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 부여지구의 중요 유적으로 등재돼 있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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