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재] 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우리지역 문화재] 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이훈학 기자
  • 승인 2019.02.1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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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일보 이훈학 기자]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해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됐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해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됐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했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해 각 면을 장식했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했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돼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자료제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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