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주 칼럼] 더 큰 꿈, 더 담대한 시도
[양형주 칼럼] 더 큰 꿈, 더 담대한 시도
  • 양형주 대전도안교회담임목사
  • 승인 2019.02.1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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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미국의 항공 여객기 시장은 더글라스 사가 주름잡고 있었다. 프로펠러 엔진을 장착한 DC-3 여객기가  더글라스사의 대표적인 제품이었다.
보잉 여객기 시리즈로 전 세계 항공여객기 시장을 주름잡는 보잉사는 당시에 상당한 위기 가운데 있었다.

당시 보잉사는 주로 군용 폭격기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회사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보잉사의 사세는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당시 보잉사 매출의 80%가 미 공군에서 일어났는데, 전쟁이 끝나자 보잉사는 5만 1000명이었던 종업원을 7500명으로 감축하기에 이르렀다.

보잉은 상업용 항공기 시장에 몇 번 뛰어들었다가 여러 번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처절한 실패 가운데 보잉은 패배감과 두려움에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패기와 도전정신은 죽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요구되었던 불가능해 보였던 항공기 성능의 한계를 불도저 같은 도전정신으로 돌파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근 제작했던 B-52 제트폭격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트 여객기 시장에 도전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제트 여객기 시장은 전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여객기 하면 당시 여객기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프로펠러 엔진을 장착한 더글라스 여객기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라. 비행기라곤 폭격기 밖에 만들어 보지 못했고, 계속해서 도전했던 상용항공기 시장에서는 늘 더글라스에게 밀려 실패했고, 매출을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큰 꿈을 향해 담대히 도전할 수 있을까?

놀라운 것은 이런 상황에서 보잉은 더 큰 꿈을 향해 담대히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제트 여객기 시장에 도전한 것이다. 여객기 프로젝트 명을 보잉 707로 명명하고 그동안 축적했던 회사의 모든 역량을 전사적으로 총동원했다.

보잉사의 이런 담대한 도전으로 마침내 세계 최초로 제트 여객기 시대가 시작되었고, 보잉사는 기사회생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어지는 727, 747기의 히트로 보잉사는 다시 일어났고 급기야 1997년에 경쟁사였던 더글러스사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오늘날 주변 환경이 녹록지 않다. 꿈꾸는 것 조차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체념과 다르지 않다.
여러 어려운 여건 중에도 나는 더 큰 꿈, 더 담대한 시도를 할 수 있을까? 다시 기운을 차리고 더 큰 그림을 그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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