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유럽의 발코니, 네르하
[스티브의 스페인 문화 프리즘] 유럽의 발코니, 네르하
  •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 승인 2019.07.0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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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하

[자유기고가 김덕현 Steve]  4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가 시작되었다. 너도 나도 해변을 찾아 휴가를 떠난다. 여름 휴가 예약은 이미 봄철 부활절 휴가를 다녀오며 끝내놓은 상태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세워진 도심지는 점점 비어가고, 현지인들의 빈 자리는 빛나는 태양을 찾는 관광객들로 채워져 간다. 7, 8월에 활활 불타는 대낮의 스페인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비로소 시에스타 Siesta가 공연히 생겨난 게 아닌, 저들의 삶의 지혜가 담긴 생존 수단이자 철학임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조금 과장을 보태 말해 머리에서 치이이 하고 김이 날 정도로 사람을 가만 놔두지 않는 이곳의 더위를 이겨내려고, 곳곳의 테라스에서 사람들은 냉토마토 수프인 가스파초 Gazpacho를 마시며 건강을 챙기거나, 시원한 과일 혼합주 상그리아 Sangria를 연신 들이키며 머리를 식혀본다.

광장 테라스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나니 안달루시아의 지중해 해안가를 따라 드라이브를 한번 해보고 싶은 충동이 든다. 지중해를 따라 달려보니 눈이 시원해진다. 표지판을 보니 길 이름부터 지중해 고속도로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끈적끈적한 라틴 음악 데스빠씨또 Despacito가 흥부자가 되게끔 어깨를 들썩이며 그루브를 타게 한다. 채널을 돌려보자 이번엔 작고한 파바로티 선생님이 활약했던 쓰리 테너의 오 나의 태양 O Sole Mio 가 호쾌하게 펼쳐진다. 스트레스는 이미 저만치 사라져 버렸다. 후련하게 뿜어내는 쓰리 테너의 목소리를 타고 그들의 태양은 벌써 나의 태양이 되어 버렸다.

말라가의 이 해안은 바로 코스타 델 솔 Costa del Sol 이라는 태양의 해변이다. 코스타 델 솔은 서쪽 지브롤터에서 동쪽 그라나다 주에 이르기까지 185km 가량 이어지는 지중해 해안에 붙여진 별칭이다. 어떤 것이든 예쁘게 표현하는 스페인 답게 태양의 해변 외에도 빛의 해변, 황금의 해변 등 단순히 ‘지중해’ 하나로 퉁치지 않고, 무려 12개의 이름을 붙여 개성을 뽐내게 만들었다.

네르하는 15개가 넘는 태양의 해변 마을 중 하나로, 특별히 ‘유럽의 발코니’란 별칭을 가졌다. 작지만 오는 이들마다 며칠이고 머무르고 싶게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유럽의 발코니란 별명은 외국인들이 붙인게 아니라, 실은 스페인 국왕인 알폰소 13세가 남긴 것이다. 유럽 각국이 저마다 유럽역사에 있어 한몫을 단단히 해서였을까. 작은 휴양지의 마을 조차 유럽이라는 스케일로 바라 보았다는 걸 생각하면 살짝 킥 하고 웃게 된다. 이곳을 그렇게도 아낀 알폰소 13세는 지금도 동상으로 남아 뒷짐을 지고 지중해를 바라보고 있다. 

알폰소 13세 동상

유럽의 발코니 바로 아래에선 사람들이 저마다 일광욕을 즐기거나 물놀이를 하며 여유롭게 보내고 있다. 누드 비치도 아닌데 상의를 탈의한 분들도 여럿 보인다.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성性의 본질을 미美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고 성욕 sex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타락한 자본주의의 결과요, 음란마귀에 씌였다며 눈길이 돌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비웃기라도 하듯, 현지인들은 당당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햇살을 찬란히 즐기고 있었다.

초록빛과 에메랄드 빛이 어우러져 일렁이는 지중해의 파도에 발을 잠시 담궈 보며 기분을 내본 후, 스페인의 국영호텔체인인 빠라도르 Parador로 발걸음을 어슬렁 거리며 옮겨본다. 북적이는 관광객과 버스킹의 기타 소리로 시끌벅적하던 해안과 달리 이곳에선 그 흔한 갈매기 하나 없이, 조용히 테라스의 음료 한잔에 몸과 마음이 함께 차분히 휴식을 취해보게 된다.

마음에선 이런 순간을 놓칠 수 없으니 사진을 남겨야지 하며 벌써 순간을 놓칠 새라 긴장한다. 그런데 고요한 환경 때문일까. 그동안 찍어왔던 그 흔한 설정샷 하나 없어도, 인증샷 하나 남겨보지 않아도 이상스레 마음에 문제가 없다. 신산했던 마음은 이미 평온의 세계로 들어가 힐링의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항우울제는 짐이 되었다. 이번 여름, 어디로 떠나면 좋을까. 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김덕현 St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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