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보기 신화와 미술의 오디세이 41
엿보기 신화와 미술의 오디세이 41
목욕하는 수잔나와 스티븐슨의 시(2)
  • 서규석 박사
  • 승인 2007.04.22 18: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유화 ‘수잔나와 두 장로들’ 반 다이크는 루벤스에게 그림을 배운 플랑드르 출신으로 성당과 수도회를 위한 성화를 잘 그렸고, 후에 영국 궁정의 수석화가로 지냈다.
전 회에 미국의 시인 스티븐스의 시 ‘건반 앞의 피터 퀸스(Peter Quince at the Clavier)’ 제1, 2부에서 장로들이 수잔나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곧 평온이 깨지는 심벌즈 소리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곧 탬버린 소리와 같은 탁음으로 3부를 이어간다.

〔3부〕
이윽고 탬버린 같은 소리를 내며 비잔틴같은 사람들이 오네.
그들은 수잔나가 옆에 있는 장로들이 왜 소스라치는지 놀랐네.
그들이 속삭이자 그 후렴은 비에 쓸려 내리는 버드나무와 소리와도 같네.
곧 치켜 올린 등불에 수잔나와 그 부끄러움이 드러났네.
그러자 선웃음을 지며 비잔틴 사람들이 탬버린 소리같이 지껄이며 도망치네.

〔4부〕
아름다움은 찰나의 마음. 맥박의 변덕스런 흔적.
그리고 육욕(肉慾)에서만큼은 영원하네.
육체는 죽어도 그 아름다움은 살아있네. 저녁은 죽어가네, 그 녹색 빛 속으로 가며.
그렇게 정원은 죽어가도 그 온유한 향기는 참회를 끝낸 겨울의 외투로 덮을 수 있네.
그렇게 아가씨는 죽어도 아가씨의 새벽 찬양 속에 살아있네.
수잔나의 음악은 백발 장로들의 음탕한 현을 건드렸네.
그러나 죽음의 역설적인 흔적을 남기며 벗어났네.
이제 그 영원불멸 속에서, 그녀를 기억하며 비올을 연주하고 끊임없는 찬미의 성찬을 이루었네.

월러스 스티븐스의 ‘건반 앞의 피터 퀸스(Peter Quince at the Clavier)’에서 피터 퀸스는 작가가 세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에서 실수연발의 시골뜨기 무대감독으로서 비극적인 사랑을 연기하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피터 퀸스는 시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소리가 아니라 느낌으로 건반을 두드리며 음악을 연주하는 지휘자이지만 작가 자신도 된다.
스티븐슨에게 있어서 시는 하나의 종교이자 의사소통이라고 평가된다.
그는 시가 사물 그 자체에 가깝도록 표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시와 사물을 나누는 이분법을 팽개친 것도 이런 이유다.
스티븐스는 현실의 모습과 상상 속의 모습이 상호 교감을 갖고 연관시키되, 상상되어지는 것은 반드시 현실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피터 퀸스의 시는 음악의 도입부처럼 저음으로부터 시작하며 손끝으로 현을 뜯는 피치카토로 전환되고, 제2부에서는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다가 곧 평온함이 깨지면서 심벌즈 소리같이 요란한 음악이 되고, 제3부는 비잔틴 시녀들이 불빛에 놀라는 탬버린 치는 소리 같은 불협화음이다.
제4부는 두 장로들의 음탕한 성향을 반영하는 수준 낮은 탄주곡이 울리다가 끝내는 수잔나를 기억하며 비올을 연주하는 찬가로 끝나게 된다.
수잔나의 시에서 그는 마치 수잔나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고 나이 들어서 맥박이 저음으로 불규칙하게 뛰는 장로들의 욕정을 음악으로 처리하면서 베이스를 깔고 있다.
그것은 마치 헌트나 로제티와 같은 19세기의 영국 화가들이 그림과 시를 하나의 회화로 통일하여 화폭에 담으려 시도했던 것처럼, 스티븐스 역시 시와 음악을 하나로 표현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1부에서 두 눈이 충혈이 되도록 수잔나의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는 나이든 장로들은 나이가 든 데다 순수하지 못한 욕정으로 심장 박동이 늦게, 그것도 저음으로 변덕스럽게 뛰고 있는 것을 손으로 뜯어내는 피치카토와도 같은 둔탁한 탄주곡으로 처리하였다.
음탕한 마음은 곧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잡소리와도 같다.
수잔나가 연인과 함께 있었다면 그 장면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 합창곡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르지만 음탕한 감정과 욕정에 불타 변덕스럽게 뛰는 심장박동을 마치 수준 낮은 음악으로 비유한 것이다.
제2부에서 목욕을 끝내고 하녀의 발걸음처럼 조심스럽게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받으며 강둑 위를 걷는 수잔나의 평온한 장면이 아름다운 선율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의 평온함도 심벌즈를 들이대는 소리처럼 장로들의 접근으로 이내 깨지고 곧 혼란이 오고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비잔틴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수잔나를 비추자 음탕한 장로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수잔나의 부끄러운 모습만 각인시키고 있다.
이 장면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한 여인의 벗은 모습과 이를 훔쳐본 노인들의 해프닝에 한바탕 웃으며 등불을 가지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것을 연상시키며, 그 배경음악은 탬버린이 담당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에서 ‘벗은 아름다움과 그것을 본 뒤의 여운’을 향기로, 음악으로 표현한 것은 계절이 바뀌어도 그 여운이 우리의 의식 속에 남아 있듯이 피터 퀸스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 여운과 향기를 비올을 연주하며 찬양하고 있다.
건반 앞의 피터 퀸스에게는 시의 구성상 ‘긴장’이 있다. 그 긴장은 다분히 수사적인 긴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음악적인 긴장으로 나타난다. 장로들의 긴장, 욕망의 긴장, 수잔나의 긴장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음악적 시에서 장로들은 죽었는가? 그렇지 않다. 마지막에 피터 퀸스는 욕망의 긴장을 해결하지 않고 비올을 키며 수잔나를 찬양하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두 장로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권위와 지위를 이용한 성희롱 사건이며,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한 여인을 범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장로들의 부정적인 측면보다 수잔나의 육감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였다.
그는 원전보다 더 수잔나를 육감적인 여인으로 만들고, 색감으로 덧칠하였다.
‘전반부의 하늘색 실크 옷을 입은 수잔나와 후반부의 맑고 깨끗한 초록물에 목욕하는 수잔나, 그리고 전반부의 붉은 눈의 장로들과 후반부의 백발장로’같은 표현에서 그는 이미 수잔나과 장로들의 색을 제시하고 대비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수잔나의 색은 장로들의 색과 더불어 메모리로 전이되어 비올을 연주하는 것으로 끝내는데, 그것은 음악적으로 방해받지 않고 기억 속의 비올 연주가 되는 것이다.
시를 음악으로 보는 스티븐스의 영감은 황무지를 발표한 엘리엇의 명성에 가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작품이지만 독특한 것이었다.
엿보기의 미학을 그의 시적 언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손으로 현을 뜯는 예리한 불협화음의 피치카토 혹은 탄주곡이 아닐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